지난달 29일 오전 일본 도쿄발 신칸센을 타고 나고야로 가는 내내 머리 속이 뒤숭숭했다. ‘평화의 소녀상’이 1일부터 나고야 일대에서 열리는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에 전시된다는 소식을 들어서다.
‘아이치 트리엔날레’는 일본 최대 규모의 국제예술제다. 이곳에 소녀상이 전시되는 것은 적지 않은 의미가 있었다. 소녀상은 일본의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 책임과 인권 유린을 정면에서 제기하는 상징물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우익들은 이런 소녀상의 존재를 기를 쓰고 지우려해 왔다.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교섭 때도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철거를 요구했다. 2013년 미국 글렌데일에 소녀상이 해외에서 처음 세워졌을 때 일본 극우단체가 철거 소송을 냈다가 패소했다. 2012년 도쿄도미술관에 소녀상의 축소 모형이 전시됐지만, 나흘 만에 철거됐다. 게다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두고 일본 정부가 경제 보복조치를 단행하면서 한·일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이런 상황인 만큼 일본 공공미술관에서의 소녀상 전시가 얼마나 민감한 지 잘 알고 있었다. 실제 주최 측은 한국 기자가 전시 개막 전 취재하러 온 사실이 알려지는 걸 꺼렸다. 일본 매체에 나기 전에 기사를 내보내선 안된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았다. 주최 측은 또 소녀상을 비롯한 전시물 사진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지 말아달라는 요청문을 전시실 앞에 붙였다. 쓰다 다이스케 예술감독은 변호사와 경찰 등과 상의하면서 “여러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다”고 했다.
‘설마’했던 우려는 사흘 만에 현실로 나타났다. 주최 측이 항의·협박 전화가 쇄도해 안전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전시를 일방적으로 중지한 것이다. 오무라 히데아키 아이치현 지사는 ‘가솔린통 방화’ 협박 팩스가 왔다고 했다. 다분히 35명이 숨진 교토애니메이션 방화 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내용이었다.
중지 결정의 배경에는 일본 정부와 정치인들의 압박이 있었다. 보조금 교부를 문제삼았고, 나고야 시장은 “일본 국민의 마음을 짓밟는 것”이라는 적반하장식 발언을 하면서 전시 중지를 요구했다. 정치가 버젓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발언을 한 것도 문제지만, 우익들의 준동을 막기는커녕 사실상 ‘오케이’ 사인을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익들이 협박하고 소란을 피우면 자기들 뜻대로 된다는 ‘나쁜 사례’를 만든 것이다.
이번 사태의 전개 과정에서 일본 사회의 강고한 벽을 느꼈다. 위안부 문제 등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역사와 여성 인권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걸 피하고, 나아가 부인하려 하는 세력들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주요 언론이 이번 사태를 ‘표현의 자유’ 문제로만 보도하는 것도 위안부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는 일본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전시 준비에 참여했던 오카모토 유카는 전시 직전 “(트리엔날레 기간인) 10월14일까지 전시가 무사히 끝나면 일본에서 식민지배 문제를 마주해온 이들에게도 희망을 줄 것”이라고 했다. 이번 사태로 그가 요즘 느끼고 있다는 ‘폐색감’(꽉 막혀 있는 느낌)이 더해질까 걱정이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소녀상은 2015년 도쿄의 한 개인갤러리에서 전시된 뒤 일본 시민들이 소중히 보관해온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용기있게 전시를 했다. 사흘 간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 대부분은 조용히 소녀상을 지켜봤다. 어떤 이는 “가슴이 온통 뒤흔들렸다”고 했다. 마지막날에는 전시장 앞에 장사진이 생겼다.
소녀상을 지키기 위해 달려온 한 ‘자원봉사자’의 조용한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조금씩 천을 만들어가는 거에요. 실을 잣고, 조각을 덧대고, 어떤 곳은 기워나가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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