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아예 ‘손타쿠’를 넘어서네요.”
최근 ‘노후자금 2000만엔’ 문제에 대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대응을 두고 도쿄의 외교 소식통이 혀를 내두르며 한 말이다.
‘손타쿠’는 ‘(남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린다’는 ‘촌탁(忖度)’의 일본식 발음이다. 아베 정권 들어선 ‘윗사람이 원하는 대로 알아서 긴다’는 뜻으로 주로 사용된다. 정부 관료나 공무원들이 알아서 정권에 코드를 맞추는 점을 비꼰 것이다. 이런 ‘손타쿠’를 넘어선다고 평가받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발단은 지난 3일 금융청이 발표한 ‘고령사회의 자산 형성·관리’ 보고서다. “연금 생활을 하는 고령부부는 30년 간 약 2000만엔(약 2억1900만원)의 여분 저축이 필요하다”는 내용에 ‘정부가 연금정책의 실패를 개인에게 떠넘긴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겸 금융담당상은 11일 “정부의 입장과 다르다”면서 “공식 보고서로 받지 않겠다”라고 했다. 모리야마 히로시(森山 裕)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은 한 술 더 떠 “(재무성이 보고서를 채택하지 않아) 보고서 자체가 없어졌다”며 야당이 요구하는 예산위원회 개최를 거부했다.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금융청 홈페이지에 버젓이 올라있는 보고서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것이다.
도쿄신문에 따르면 보고서를 작성한 워킹그룹은 대학교수, 변호사, 민간싱크탱크 대표 등으로 구성됐다. 재무성과 후생노동성 등 관계부처도 옵저버로 참가하고 있다. 이 워킹그룹은 아소 부총리의 자문을 받아 설치됐다. 전문가에 의견을 구하면서 정작 답은 듣지 않겠다고 하는 셈이다. “전대미문의 부조리극”(마이니치신문)이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이유다.
아베 정권은 그간 ‘은폐 본질’을 누누히 비판받아 왔다. 남수단 평화유지활동(PKO) 육상자위대의 일일보고 은폐, 모리토모(森友)학원 국유지 헐값 매입 의혹과 관련한 재무성 문서조작 등 불리하거나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숨기거나 발뺌해 왔다. ‘아베 1강’ 체제의 장기화로 ‘손타쿠’ 구조가 확산된 데 따른 것이란 지적을 받고 있다. 이번 ‘노후자금 2000만엔’ 논란도 아베 정권의 ‘은폐 본질’이나 ‘손타쿠’ 구조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정권의 중추들이 아예 대놓고 은폐나 손타쿠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심각하다.
사실 이번 보고서의 내용이 허무맹랑한 게 아니다. ‘30년 간 2000만엔이 필요하다’는 추계의 근거자료는 후생노동성이 제공했다. 금융청이 독자적으로 ‘30년 간 1500만~3000만엔 필요’라는 추계를 내 워킹그룹에 제시한 것도드러났다. 정부로선 보고서의 문제 제기를 냉정하게 짚어보고 대응책을 논의하는 게 순리다. 그런데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부·여당에 불리한 사실이 나오면 곤란하니까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이다. 앞으로 정권 눈치를 보는 보고서만 내라는 격이다.
이런 아베 정권의 막무가내식 태도를 허용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일본 국민이다. 문제가 생겨도 발뺌을 하거나 거짓말로 강변하면 넘어갈 수 있다는 믿음을 아베 정권에 심어준 것이다. 정치평론가 이토 아쓰오(伊藤惇夫)는 최근 도쿄신문에 “관료의 손타쿠나 불상사, 정치가의 폭언·실언이 빈발해도 내각 지지율은 잠깐 내려갈 뿐 곧 회복된다. 국민으로선 다른 선택지가 없고, 지지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무엇이 일어나도 아무렇지 않게 됐다”고 밝혔다.
흔히들 아베 정권의 장기화로 일본 사회의 우경화가 가속화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무엇이 문제인지 느끼지 못하는 구조가 고착화하고 있다는 데 있는 게 아닐까. 7월 참의원 선거가 그 잣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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