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1일 0시를 기해 ‘레이와(令和)’ 시대로 들어갔다. 새 일왕에 즉위한 나루히토(德仁·59)는 ‘전후(戰後) 세대’ 첫 일왕으로, 아버지 아키히토(明仁)가 구축한 ‘상징 일왕’을 어떻게 이어갈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새 일왕 즉위를 계기로 ‘새 국가 만들기’ 분위기를 조성, 재무장과 평화헌법 개정을 달성하려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움직임도 주목된다.
■‘전후 세대’ 첫 일왕의 시대
나루히토 일왕은 ‘사상 최초’라는 수식어가 여러 개 따라붙는다.
1960년생인 그는 할아버지·아버지와 달리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다. 패전까지 “국가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했던 일왕의 ‘절대권력’을 겪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죄의식이나 부채감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대원수’로 육·해군을 통수했던 할아버지 히로히토(裕仁)는 패전 후 전범 재판을 가까스로 피했지만, ‘침략전쟁 책임론’에 평생 시달렸다. 아버지 아키히토는 이런 히로히토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반전과 평화를 강조해왔다.
나루히토는 ‘상징 일왕제’ 아래 태어났기 때문에 역대 왕족들과는 다른 인생 경험을 쌓았다. 신하들의 손에 길러진 게 아니라 양친의 보육을 받았다. 최초의 해외유학파 일왕이다. 그는 1983~1985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의 유학 시절을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기 중 하나”라고 회고한다.
7년간 구애 끝에 하버드대 출신 외교관 오와다 마사코(小和田雅子)와 1993년 결혼했다. 2001년 아이코(愛子) 공주를 얻었지만, 2003년 궁내청은 마사코 왕세자비가 ‘적응 장애’로 고통받고 있다고 발표했다. 아들 출산에 대한 주변의 압박 등이 원인이었다. 이에 나루히토는 2004년 “마사코의 경력과 인격을 부정하는 움직임이 있다”는 폭탄발언을 했다. 나루히토는 근대 들어 아들이 없는 첫 일왕이다. 일왕 계승 1순위는 동생인 후미히토(文仁·54), 2순위는 후미히토의 외아들 히사히토(悠仁·13)다.
■새롭게 구축해갈 ‘상징 일왕’
나루히토는 2015년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려고 하는 오늘, 겸허히 과거를 되돌아보고,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비참한 체험이나 일본이 걸어온 역사를 올바르게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가 아버지의 ‘평화주의 일왕’ 모델을 이어갈 것으로 예상하는 이유다. 그는 당시 “지금의 일본은 전후 헌법을 기초로 쌓아올려졌고 평화와 번영을 향유하고 있다”며 아베 정권의 개헌 움직임을 우회적으로 견제하기도 했다.
일본 왕실 전문가인 이노우에 마코토(井上亮) 니혼게이자이신문 편집위원은 “인간적이고, 국민에 다가서고, 사회적 약자에 눈을 돌리고, 역사를 반성한다는 아키히토 일왕의 스타일을 이어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활동량이나 방식 등 ‘각론’에선 자신의 색깔을 점점 드러낼 것으로 예상된다. 나루히토는 산을 좋아해 170회 넘게 등산을 했다. 물이나 환경 문제에도 관심이 높다. 새 일왕과 왕비 모두 외국 경험이 풍부하다. 이런 관심사들이 국제무대에서 발휘되길 기대하는 시각도 있다.
하라 다케시 일본방송대 교수는 <헤이세이의 종언>에서 “아키히토 일왕이 ‘위령 여행’으로 방문한 곳은 1944~1945년 미국과 싸워 패한 섬들”이라며 “나루히토 일왕이 한반도, 대만, 사할린 등 과거 식민지를 방문한다면 다른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루히토 왕세자는 1일 오전 10시30분 검새(劍璽·검과 곡옥) 등 승계의식에 이어 오전 11시10분부터 총리 등 국민 대표들을 처음 만나는 ‘즉위 후 조현(朝見)’ 의식을 갖는다. 이 자리에서 첫 ‘오고토바(발언)’를 한다. 향후 행보를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우경화’ 흐름 빨라질까
새 일왕 즉위를 계기로 일본 사회에 민족주의와 국수주의가 고양될 가능성이 높다. 오는 4일 시민들이 처음 새 일왕 즉위를 축하하는 ‘일반 참하’, 오는 10월22일 공식 즉위식, 11월14~15일 새 일왕이 국민의 안녕을 신에게 비는 ‘다이조사이(大嘗祭)’ 등 즉위 행사들은 일왕가에 대한 관심은 물론, 일왕의 권위나 신성을 부각시키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일왕이 신격화된 권위를 가졌던 전전(戰前) 천황제로의 회귀를 꿈꾸는 우익들이 바라는 상황이다. 우익 세력들은 지금까지 일왕 부부의 각지 방문에 맞춰 등불을 들고 맞이하는 행사를 반복하는 등 일왕의 권위화를 꾀해왔다.
아베 정권의 ‘우향우’ 움직임도 ‘상징 일왕’의 위상이나 활동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아베 총리는 ‘전후 체제의 탈각’을 통해 ‘전쟁이 가능한 보통국가화’를 추진하고 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전후 세대’ 일왕의 즉위는 이런 염원을 실현하기에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셈이다.
아베 총리는 새 연호 발표와 새 일왕 즉위로 사회 전반에 조성되고 있는 ‘새 시대, 새 출발’ 분위기에 편승해 ‘강한 국가’ 만들기를 외치고 있다. 지난 23일 “새로운 시대의 출발선에 서서 어떤 나라를 만들지 이 나라의 미래상에 대해 정면으로 논의해야 할 때가 오고 있다”고 했다. ‘새 시대→새 국가→재무장과 개헌’ 논리를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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