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퇴위하는 아키히토(明仁) 일왕은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절대 군주’에서 ‘국가의 상징’으로 격하된 일왕의 새 모델을 확립한 것으로 평가된다.
아키히토 일왕은 재해 피해 지역이나 장애인·노인 복지 시설 등 소외된 이들을 방문해 고락을 나누는 모습을 적극 보였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발생 직후 피난소 주민들을 찾아 무릎을 꿇고 대화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59년 마사다 미치코(正田美智子)와 결혼한 이후 왕세자 30년, 일왕 30년 등 60년 간 전국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광역자치단체)을 모두 3차례나 순회했다.
또한 전쟁의 역사와 마주하고, ‘평화의 메시지’를 줄곧 발신해왔다. 아버지 히로히토(裕仁·1926~1989년 재위)는 원활한 통치를 위해 일왕의 존재를 이용하려 했던 미국 덕에 겨우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지만, 평생 ‘침략전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반면 11세 때 패전을 지켜본 아키히토 일왕은 즉위 이후 ‘위령의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2차 대전 격전지를 방문해 희생자를 위로했다. 히로히토가 전후 한 번도 찾지 않은 오키나와는 왕세자 시절을 포함해 11차례나 방문했다. 오키나와는 2차 대전 당시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한 일본군과 미군의 지상전투가 벌어지면서 주민 9만4000명을 포함, 총 20만명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2005년에는 사이판을 찾아 일본군 위령비를 참배했고, 이때 한국인 희생자 추념 평화탑도 찾아 묵념했다.
그는 지난 4년간 패전일(종전일)인 8월15일 “과거를 돌이켜보며 깊은 반성과 앞으로 전쟁의 참화가 재차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말을 반복했다. 1998년 일본을 찾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우리나라가 한반도의 여러분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시대가 있었다”며 사과의 뜻을 밝혔다. 재임 기간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靖國)신사도 찾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가해 책임’과 ‘반성’은 회피한 채 재무장과 평화헌법 개정을 추진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을 간접적으로 견제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키히토 일왕은 지난 4일 후안 카를로스 바렐라 파나마 대통령을 만나서도 “헤이세이(平成)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왕실 전문가인 이노우에 마코토(井上亮) 니혼게이자이신문 편집위원은 최근 외신기자센터 브리핑에서 “아키히토 일왕은 인간으로서의 ‘상징천황’을 구축하기 위해 싸워왔다”면서 “히로히토 일왕 시대에 터부였던 전쟁의 역사와 마주한 것은 결국 아버지의 전쟁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아키히토 일왕의 이런 자세 덕분에 전후 ‘상징천황제’는 일본 국민 속에 뿌리를 내리게됐다는 평가다. NHK가 1973년부터 5년 간격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일왕을 ‘존경하는 마음이 있다’는 응답은 41%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호감이 있다’는 응답(36%)을 합치면 77%가 존경 또는 호감을 나타냈다. 아사히신문의 4월 조사에서도 ‘왕실에 친밀감을 느낀다’는 76%로, 1959년 여론조사를 시작한 이래 최고치였다.
다만 일본인들에게 ‘헤이세이’ 시대가 마냥 좋았던 그 시절로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베를린 장벽 붕괴 등 동구권의 몰락과 함께 시작한 ‘헤이세이’ 시대는 1990년 버블 경제 붕괴, 1995년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 1995년 한신대지진과 2011년 동일본대지진 등 잇따른 자연재해, 저출산고령화와 격차사회의 확대 등 많은 문제를 껴안은 시기였다. 소설가 마야마 진(眞山仁)은 지난 27일자 아사히신문에 헤이세이 시대가 ‘천지와 내외의 평화를 이룬다’는 뜻과는 반대로 “소요(騷擾)의 30년이었다”고 평가했다. NHK의 지난 9~11일 조사를 보면 ‘헤이세이’ 시대 이미지로 ‘전쟁이 없고 평화로운 시대’가 79%로 가장 많았지만, ‘사회적 약자에 친절한 사회’는 30%에 머물렀다.
아키히토 일왕이 상징천황제의 새 모델를 구축한 것은 이런 시대 분위기와 맞아떨어진 측면도 있다. 서민들에게 다가가는 일관된 자세로 이들의 불안을 달래고, 분단된 사회를 통합하는 역할을 적극 수행한 것이다. 하지만 일왕의 이런 행보가 오히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의 역할을 대신하고, 나아가 ‘김 빼기’ 역할을 하면서 역동성을 저해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아키히토의 인기가 천황제에 대한 문제 제기 자체를 차단하는 효과도 있다. 비록 헤이세이가 ‘전쟁이 없고 평화로운 시대’였지만, 21세기 들어 집단자위권 용인 등 사실상 ‘전쟁할 수 있는 태세’를 착착 준비해온 30년이라는 지적도 있다.
아키히토 일왕은 30일 오후 5시 고쿄(皇居)로 불리는 도쿄 왕궁 내 ‘마쓰노마’에서 공식 퇴위식을 치른다. 퇴위 후엔 ‘상왕(上皇·조코)’이 된다. 근대 들어 처음으로 전·현직 일왕이 존재하면서 당분간 일왕의 ‘이중구조’ 상태가 이어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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