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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김진우의 도쿄 리포트

'일본 대단해'론의 함정

 지난 10일 밤(한국시간) ‘인류 사상 첫 블랙홀 관측’ 소식이 전 세계에 타전됐다. 세계 13개 연구기관, 200명 이상의 연구자가 참가한 ‘사건 지평선 망원경(Event Horizon Telescope·EHT)’ 프로젝트팀이 처녀자리 은하단에 있는 M87의 중심부에 존재하는 블랙홀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번 관측은 블랙홀 연구의 새 장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 언론도 이를 비중있게 보도하면서 ‘한국도 참여’라는 대목을 빼놓지 않았다. 역사적인 프로젝트에 한국도 이름을 올렸다는 것이다.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주요 신문들은 11일자 조간 1면에 이 소식을 전하면서 ‘일본 국립천문대를 비롯한’ 국제연구팀의 성과임을 강조했다. 그런데 보수·우익 성향 <산케이신문> 제목이 묘했다. ‘블랙홀 포착’ 제목 밑에 ‘세계 최초 국립천문대팀 촬영’이라는 소제목을 달았다. 이번 성과를 오롯이 일본의 ‘위업’으로 오인하게 할 제목이다.
 일본을 돋보이게 하려는 사례는 또 있다. 이번 관측을 설명한 미국 국립과학재단의 기자회견장. 미 주간지 <타임> 유튜브 채널에 따르면 일본 NHK 기자가 “이번 건이 엄청난 공동협력이라고 알고 있다. 각국, 특히 일본의 기여에 대해 세부사항을 더 자세히 말해달라”고 질문했다. 이 기자가 국명을 밝히자 “잠시 머뭇한 뒤 다른 기자들의 부드러운 웃음소리들이 뒤따랐다”고 일본 영자일간지 <재팬타임스>는 전했다.
 이 기자의 질문에 대해 쉐퍼드 도엘레만 EHT 단장은 “일본은 많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서 “중요한 것은 각 나라, 각 지역, 각 그룹, 각 연구소가 그들의 전문지식과 작업들을 갖고 왔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국경을 넘어 구성된 프로젝트팀이 이룩한 성과에서 ‘특히 일본’의 역할을 찾으려는 기자의 ‘우문’에 ‘현답’을 한 셈이다.
 일부 문제로 치부할 지 모르지만, 일본에서 ‘일본 스고이(대단해)론’을 자주 접하는 건 사실이다. <세계가 놀란 일본, 대단하네요>처럼 외국인이 일본을 상찬하는 TV 프로그램이나 서적들이 넘친다. 국제대회에서 일본 선수가 우승하면 “일본인 대단합니다”라는 진행자 멘트가 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전문가들은 ‘일본 대단해론’이 부상하게 된 것을 일본의 위상과 사회 변화에서 찾고 있다. 1990년대 버블 경제 붕괴, 1995년 한신대지진과 2011년 동일본대지진 등 잇따른 자연재해, 중국의 추월 등에 따른 불안감이 배경이라는 것이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고도성장을 이뤄내 ‘재팬 애즈 넘버원(Japan as number one·1등 일본)’으로 불렸던 ‘좋았던 그 시절’을 돌아보는 작품이 인기를 얻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국수·복고주의 경향은 앞으로 더욱 짙어질 가능성이 높다. 내달 1일 새 일왕 즉위를 앞둔 ‘개원(改元·연호가 바뀜)’ 열기가 이를 방증한다. 일왕 퇴·즉위 행사는 일왕이 ‘인간신’으로 군림했던 전전(戰前) 회귀를 꿈꾸는 우익들에겐 기회다. 개원 이후엔 6월 오사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9월 럭비 월드컵, 내년‘ 7월 도쿄 올림픽 등 대형 행사들이 대기하고 있다. 2006년 1차 내각 발족 당시 ‘아름다운 나라로’를 내걸었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은 국수주의를 더욱 부채질할 것이다.
 ‘일본 대단해론’의 맞은편엔 혐한·혐중 책이 넘쳐난다.지난 21일 끝난 통일지방선거에선 극우 세력들이 유세에서 혐한 발언을 쏟아냈다. ‘불편한 진실’에는 눈을 감고 자국의 훌륭함만 미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배타주의에 빠지기 쉽다. 과거 일본이 전쟁으로 치달을 때 ‘신의 나라 일본’이나 ‘일본 대단해’ 논리가 넘쳐났다. 하지만 이런 ‘정신승리’가 파국을 막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