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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김진우의 도쿄 리포트

일본의 '개원 피버'

 지금 일본에서 가장 ‘핫’한 단어는 ‘개원(改元·연호가 바뀜)’이다. 오는 30일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퇴위와 5월1일 나루히토(德仁) 새 일왕의 즉위를 앞두고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TV에는 아키히토 일왕의 연호인 ‘헤이세이(平成·1989~2019년)’를 돌아보는 프로그램이 넘친다. ‘헤이세이 최후의 ○○’라는 상품 판매도 잇따르고 있다. 지난 1일 나루히토 일왕의 연호가 ‘레이와(令和)’로 정해지면서 분위기는 더 달아오르고 있다. 그간 새 연호에 대한 예상이나 설문조사를 연일 보도해온 언론 매체들은 특집을 대거 마련했다. 백화점에선 ‘레이와’ 글자를 새긴 케이크를 판매하는 등 일찌감치 ‘레이와 마케팅’도 벌어지고 있다. 히로히토(裕仁) 일왕 서거에 따라 ‘자숙’ 분위기가 사회 전체를 짓눌렀던 1989년 개원과는 달리 이번에는 일왕의 생전 퇴위로 모두들 마음 놓고 개원을 즐기는 모양새다.
 이런 열띤 분위기는 일왕의 퇴·즉위와 최장 10일 연휴인 ‘골든 위크’가 걸친 4월말·5월초를 정점으로 올해 내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오는 10월22일에는 새 일왕의 공식 즉위식과 카 퍼레이드가 진행된다. 11월 14~15일에는 새 일왕이 국민의 안녕을 신에게 비는 ‘다이조사이(大嘗祭)’가 거행된다. 일왕에게 권위와 신성을 부여하는 의식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연호와 서력(西曆)을 함께 쓰는 일본에서 연호는 시대를 구분짓는 의미가 강하다. 연호가 바뀌는 것을 한 시대가 끝나고 새 시대가 시작된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새로운 연호는 시대를 리셋시킨다”고 했다. 거품 경제 붕괴, 저출산고령화, 격차사회의 확대 등 탈 많았던 헤이세이를 뒤로 하고, ‘새 연호로 새 출발’ 하자는 것이다.
 ‘새 연호로 새 출발’를 연출하는 데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 정권도 빠지지 않는다. 아베 총리는 1일 이례적으로 직접 담화를 발표하면서 “희망으로 넘치는 새로운 시대를 국민과 함께 열어나갈 것”이라고 했다. ‘일하는 방식’, ‘1억 총활약사회’ 같은 자신의 정책을 거론하는 등 마치 국회 연설 같았다. 정권이 연호 발표를 ‘정치쇼’로 만든다는 지적이 나온다.
 하지만 헤이세이의 과제들을 아무 일 없던 듯 지나갈 수 없는 법이다. 최근 교도통신 여론조사에서 ‘헤이세이 뉴스 1위’로 꼽힌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사고가 대표적이다. 도쿄전력은 30~40년 후 완료를 목표로 폐로 작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폐로’의 최종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일본 언론은 지적하고 있다. 100만t에 달하는 오염수 처리도 문제다.
 연호는 일본 국수주의나 내셔널리즘과 뗄래야 뗄 수 없다. ‘일세일원(一世一元 ·1대에 하나의 연호)’ 원칙은 1868년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강화된 천황제 중심 이데올로기 체제의 유물이다.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군국주의 색채를 이유로 공식 사용을 금지했던 연호를 1979년 원호법 제정으로 부활시킨 것이 현재 일본 최대 우익단체인 ‘일본회의’로 이어지는 세력들이었다. 이들에겐 전전(戰前) 천황제로의 회귀가 염원이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경험한 한국으로선 천황제는 불편한 대상이다. 현 히로히토 일왕은 평화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부친 히로히토는 패전 후 ‘상징’적 존재로 연명함으로써 전쟁 책임을 비롯한 천황제의 문제를 애매하게 희석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일본인들이 과거 침략행위를 반성하려 하지 않는 것도 천황제의 존속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이다. 원로 작가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는 최근 도쿄신문에 “이번이 천황(일왕)이란 뭔지 냉정하게 주시할 수 있는 기회”라고 했지만, 그런 기회는 좀체 살려지지 않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