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1775~1817년)은 영국 소설의 위대한 전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다. ‘오만과 편견’ ‘엠마’ 등 그의 작품들은 현재까지도 수백만명의 열성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고, 영화, 연극, 드라마에서 무수히 개작되면서 대중적인 문학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젊은이들의 연애와 결혼을 그린 오스틴의 소설은 역사의식과 사회인식이 결여돼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세밀한 관찰력과 예리한 시선으로 당대의 물질지향적인 세태와 허위의식을 날카롭게 짚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독립적인 성격의 여성 캐릭터를 창조하고 여성 작가에 대한 장벽과 싸우면서 계속 작품을 발표했다는 점에서 ‘원조 페미니스트’라고도 불린다.
오스틴 서거 200주년이 되는 올해에는 작품의 배경이 된 영국 남부 바스를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미 극우들, 오스틴 소설을 ‘성적 순수’ ‘사라진 백인문화’ ‘여성 열등성’의 상징으로
그런데 최근 이런 제인 오스틴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의외의 집단’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인 ‘알트라이트’(Alt-Right·대안우파)를 비롯한 미국의 극우주의자들이다. ‘나치’를 연상시키는 자신들의 이미지를 ‘세탁’하기 위해 오스틴을 끌어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1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 뉴욕타임스 등에 따르면 콜로라도 영문학 부교수인 니콜 라이트는 지난 12일 ‘고등교육 연대기’에 실린 ‘알트라이트 제인 오스틴’이라는 글에서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결혼을 옹호하는 ‘성적 순수’의 상징으로 오스틴을 끌어오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오스틴의 작품 속에서 행복한 결혼은 예외에 속한다.
특히 극우주의자들은 ‘오만과 편견’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을 ‘페미니스트의 아이콘’으로, ‘엠마’의 여주인공 엠마 우드하우스를 귀족적 특권에 대한 도전자로 보기보다는, 오스틴이 보수주의 스타일을 어떻게 개척해나갔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서 들고 있다. 알트라이트 관련 사이트들에 올라온 오스틴 관련 게시물들은 결혼 전통주의와 명백한 인종차별주의를 연결시킨다. 예를 들어 ‘백인 민족주의에서 여성 문제’라는 게시물에선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결혼에 대한 관점이 서구 문명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인종 독재”에 들어맞는다고 논하고 있다. 한 네티즌은 “‘오만과 편견’ 풍의 전통적인 결혼이 단일민족국가(ethnostate)에서 다시 부과된다면 우리는 신사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적었다.
극우주의자들은 또한 오스틴을 “사라진 백인 전통 문화”와 “여성 열등성 규칙을 증명하는 예외”의 주장차로서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들은 엄밀한 검증을 거친 게 아니라고 라이트는 지적했다. 그는 “오스틴의 주인공들은 단일민족국가를 부추기는 포률리즘 선동과 민족적 유산에 대한 집착을 조금도 표현하지 않는다”라고 말햇다.
라이트가 이 같은 분석 작업에 들어갔던 이유는 알트라이트의 지도자를 자처하는 밀로 이아노풀로스가 지난 1월 한 연설에서 오스틴을 끌어다쓰는 걸 보고나서다. 당시 이아노풀로스는 “빅토리아 시대 소설가가 말했듯이 ‘못 생긴 여성이 섹시한 여성보다 페미니스트가 될 확률이 훨씬 높다’는 건 보편적인 진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인용은 잘못된 것이다. 오스틴은 빅토리아 시대가 시작되기 20년쯤 전에 사망했다. 게다가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보편적 진실”은 “재산이 많은 독신남이라면 분명 아내를 원할 것”이라는 문장으로, 이는 부드럽게 비꼰 문장이다.
■“우리도 보통사람”... 극우들의 이미지 세탁용
라이트는 극우 사이트들을 훑어본 결과, 오스틴의 이름이 특정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을 발견했다. 라이트는 “자신들의 운동을 독일의 히틀러나 괴벨스와 비교하는 대신 한 세기에 걸쳐 열광적인 팬덤과 학문적 추종자를 가진 오스틴의 아늑한 영국과 비교함으로써 알트라이트는 자신들을 보통 사람들의 눈에 맞춰 평범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오스틴은 신화화한 과거를 지지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더 나은 과거의 브리튼’이라는 비전을 가진 브렉시터(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지지자)의 향수에 영합하기 위해서도 활용된다고 라이트는 지적했다. 그러한 인용들을 통해 알트라이트 사이트를 우연히 들른 사람들이 이 백인 극우주의자들이 주류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하버드대 출판부에서 발간한 ‘엠마’를 편집한 배럿 탠던은 오스틴의 팬을 자처하는 극우주의자들이 실제로 오스틴의 책을 읽었는지 의구심을 표한다. 탠던은 “오스틴 작품 속 인물들 중에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했을 유일한 인물은 ‘맨스필드 파크’의 잔혹하고 속물적인 노리스 부인뿐일 것”이라고 했다. 제인 오스틴에 대한 전기에서 오스틴이 대중적인 이미지보다 더 급진적인 여성이었음을 밝혔던 클레어 토말린은 오스틴과 백인 극우주의자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는 “오스틴은 윌리엄 코퍼의 시를 사랑했는데, 코퍼는 사냥과 사격을 반대했다”라고 말했다.
사실 오스틴은 오랫동안 정치적 논쟁에서 인용돼온 작가다. ‘미국인의 오스틴 읽기’의 저자인 줄리엣 웰스 가우처대 부교수는 뉴욕타임스에 “셰익스피어와 비할 수 있을 정도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일한 여성 작가인 오스틴은 이런 논쟁에 끌려들어오는 작가”라면서 “그것은 그녀의 막대한 국제적 명성의 이면”이라고 말했다. 웰스는 “학교에서 다문화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학자들은 불편한 진실들과 씨름해왔다”면서 “오스틴의 인물들은 백인이고, 그녀의 세계는 흰색이다. 그걸로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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