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간 만에 ‘부라부라’(어슬렁어슬렁). 그것도 한 달이 지난 얘기.
장소는 도쿄 북부 도치기현 아시카가(足利)시에 자리한 아시카가 플라워 파크. “숨을 삼킬 정도로 아름답다”는 평판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거대한 등나무꽃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올해는 더위가 2~3주 가까이 빨리 온 탓에 꽃들이 빨리 졌다. 벚꽃을 시작으로 웬만한 꽃들은 예년보다 빨리 피고 지는 바람에 웬만한 꽃 축제들은 다들 울상이다.
아시카가 플라워 파크의 등꽃도 5월초가 한창일 때라는데 이미 만개 시기는 지나고 있었다. 이미 갔다온 선배한테 이런 얘기를 들었던 터라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흰 등꽃은 거의 다 진 상태였고, 보라꽃 등꽃과 노란색 등꽃도 꽃이 든 자리에 열매가 나려고 초록빛을 띄고 있었다.
거대한 등꽃 터널을 즐기기엔 이미 늦었지만, 남은 등꽃도 그럭저럭 있어서 꽃놀이를 즐길 만했다. 장미와 철쭉, 그리고 클레마티스라는 꽃들도 가득 피어 있어서 도쿄에서 전철을 세 번 갈아타고 2시간을 달려온 보람은 있었다.
5월초인데도 초여름 같은 땡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하지만, ‘휴식 언덕’에 세워진 파라솔 밑에 앉아서 먼 산을 바라보는 느낌은 꽤 괜찮았다.
라벤더로 유명한 홋카이도 후라노에 ‘라벤더 아이스크림’이 있듯이, 이곳에는 ‘등꽃 아이스크림’이 있었다. 맛은 둘 다 비슷한 것 같긴 했지만.
아시카가 플라워 파크를 다 둘러보고도 해가 저물기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다. 그래서 전철역 안내 포스터에서 본 아시카가 시내 쪽을 둘러보기로 했다. JR 료모선을 타고 10여분을 달려 아시카가 역에 도착. 역 앞은 한적한 시골 도시 같은 느낌. 역 인근 편의점 앞에는 남녀 고교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군것질을 하고 있었다.
아시카가, 아시카가.
이름이 낯이 익다 싶었는데 무로마치(室町·1338~1573) 막부를 열었던 아시카가씨의 발상지로, 유서 깊은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역에서 걸어갈 수 있는 곳 몇 군데를 둘러본다.
일본인 여행객들을 눈치껏 따라 10분 정도 걷다보니 이시다타미(石疊·납작한 돌을 깐 곳) 길로 들어선다. ‘아시카가 학교’를 알리는 안내판이 보이고, 그 뒤쪽으로 중후한 문이 보인다.
아시카가 학교는 일본 최고(最古)의 학교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학교의 창설과 관련해선 여러 설이 있다. 나라(奈良) 시대(710~784)에 지역별로 세워진 학교라는 설, 헤이안(平安) 시대( 794~1185) 학자 오노노 다카무라가 세웠다는 설. 아시카가씨 2대째인 요시카네(義兼)가 지었다는 설. 전성기였던 16세기 중반 선교사였던 프란시스코 자비에르가 “일본국 중 가장 유명한 관동의 대학”이라고 소개했다. “학생 3천”이라고도 일컬어졌다고 한다.
메이지 5년(1872) 대학으로서의 역할을 끝내고 건물 일부만 남아있었지만, 1990년에 에도 시대(1603~1867) 중기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입구에서 요금을 내니 입장권 대신 ‘입학증’을 준다. 바로 앞에는 ‘학교(學校)’라고 써진 현판이 달린 문이 보인다. 문을 통과하면, ‘입학’하는 기분이다.
눈 앞으로는 공자묘가 있다. 대성전이라는 현판이 달린 건물 안쪽의 어둑어둑한 곳에 공자상이 모셔져 있다. 공자묘가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에선 유학이 중심이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역학과 병법 등도 배울 수 있어 군사(軍師) 육성에도 기여했다고 한다. 에도 막부 초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브레인’이었던 승려 덴카이(天海)도 이곳에서 배웠다.
공자묘 옆으로는 학생들의 강의와 학습 등을 실시하는 방장(方丈)이 있다. 방장 입구엔 긴 바가지처럼 생긴 도구에 물을 넣는 장치가 있다. 물을 너무 많이 넣으면 뒤집어진다. 공자의 ‘중용’의 가르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방장 안으로 들어가니 서적들이 전시돼 있다. 이곳의 한문 서적 4종 77책은 국보로 지정돼 있다. 방장 안쪽에는 사람들이 앉아서 연필로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다. ‘아시카가 학교 한자시험’이라고, 한자 능력을 테스트해보는 것이다.
한자시험과는 인연이 없으니 방장 앞 마루에 앉아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낸다. 눈앞에 펼쳐진 작은 연못과 신록들이 상쾌함을 전해주고 있다. 산들바람이 시원하다.
아시카가 학교를 나와 옆으로 조금만 더 가면 반나지(鑁阿寺)라는 절이 나온다. 절 부지가 해자와 보루로 둘러싸여 있어 아치형 다리를 건너는 게 특이하다. 절을 창건한 사람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요시카네의 저택 부지에 지어졌다. 1196년에 창건, 1299년에 재건했다. 일본에서도 보기 드문 가마쿠라(鎌倉) 시대(1185~1333)의 선종 양식 건축물로 2013년 국보로 지정됐다고 한다.
본당과 종루 등을 둘러보고 절을 빠져 나왔다. 모나카를 팔고 있는 가게가 있다. 모나카는 정사각형 모양에 한자 인장이 찍힌 모양새다. 아시카가 학교와 반나지에 전해지는 옛 인장을 테마로 만든 모나카로 이곳의 특산품이다.
인근에는 나카가와라는 음식점이 있는데 서예가 아이다 미쓰오가 자주 다녔던 곳이다. 가게에는 그가 쓴 간판을 비롯, 단순하고 소박한 아이다의 서예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소바라도 먹어볼까 들어갔으나 많이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포기. 결국 역 앞의 우동 체인점에서 배를 채우고, 아시카가시에서의 짧은 부라부라도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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