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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통신

[도쿄 부라부라]'일본의 지붕' 나가노를 가다 ③시가고원

 
 날이 흐렸다. 비가 좌악좌악 내리던 전날 밤에 비하면 그나마 낫긴 하지만.
 어떻게 할까 싶었다.
 원래는 나가노시 서쪽에 자리잡은 도카쿠시(戶隱) 국립공원을 가볼까 생각했다. 삼나무 숲길과 일본 고대 신앙, 닌자 등으로 유명한.
 그런데 숙소가 있는 유다나카(湯田中)는 나가노시 동북쪽이라 가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 전날 가미코치를 갔다오느라 좀 지치기도 했다. 그래서 바로 근처에 있는 시가고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이 선택을 두고 후회하긴 했지만. 뭐, 어쩔 수 없다.

 시가고원은 조신에쓰(上信越)고원국립공원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때  경기장으로 사용되는 등 스키 리조트로 유명하다. 비시즌에는 해발 2000m 전후의 고원과 산에 트래킹 코스를 만들어 리프트나 곤돌라를 타고 둘러볼 수 있게 해놓았다. 시가고원은 특히 화산 활동에 따라 다양한 지형이 형성돼 있고, 크고 작은 습원이나 연못과 호수 등 70곳이 점재하고 있다. 시가고원자연보호센터에 따르면 19개의 트래킹 코스가 설정돼 있는데 일반인(·중급코스라고 돼 있었다) 코스라는 ‘이케메구리 코스’를 따라가보기로 했다. 연못을 따라걷는 코스라는 뜻이다. 

 유다나카 인근에는 온천을 즐기는 원숭이들로 유명한 ‘지옥계곡 야생원숭이 공원’이 있었다. 한여름에 무슨 온천 원숭이냐 싶어 패스. 바로 시가고원 쪽으로 향했다.

 차가 고원 쪽으로 난 길을 따라갈수록 안개가 점점 짙어진다. ‘선 밸리’라는 스키장이 보이는 곳에 이르자, 그 옆으로 조그마한 연못이 보인다. 차를 대고 내려가보니 ‘이치누마(一沼)’라는 곳이다.


  안개가 낮게 깔린 연못에는 연꽃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 연못가에는 자연학습을 하는지 초등학생 5·6학년쯤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노트를 들고 모여 있다. 이들을 인솔하는 진행자(교사?)가 있는데, 여장을 한 이도 있다. 무슨 이벤트라도 하는 모양이다. 눈이 마주치자 서로 겸연쩍어한다.

 초등학생들을 따라간 곳에 또 다른 연못이 있다. 비와이케(琵琶池)라는 이름을 가졌다. 일본 시가현에 있는 일본 최대 호수 비와호의 형태를 닮았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 아까 본 이치누마에 비해선 훨씬 커서 호수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다. 카누를 타는 곳도 있다. 연못을 빙 도는 길 주변에 자작나무가 늘어서 있어 걷는 맛을 더한다. 이곳을 걷는 코스를 ‘선샤인 루트’라고 하는 모양이다.


 ‘이케메구리 코스’의 출발점으로 갔다. 입구에 차를 대고 임도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이 때만 해도 고생길이 시작되는 줄은 몰랐다. 

 차 한 대가 지나갈 만한 길이 줄곧 이어진다. 트래킹을 하는 이들과도 몇 차례 엇갈린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그칠 기미가 없었다. 우산을 챙겨 왔지만 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다고 돌아가기에도 애매할 정도로 이미 많은 거리를 왔다. 보트를 실은 트럭이나 행사복장을 한 사람들이 탄 미니밴이 반대 쪽으로 내려간다. 구글맵 상으로 보이는 호수는 1시간 가까이 되도록 나타날 기미가 없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호수. 오누마이케(大沼池)다. 해발 1690미터에 이런 호수가 자리잡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그리고 진기한 에메랄드 빛이다. 비가 오지 않았으면 더욱 영롱한 색을 띄었을 텐데. 멀리 붉은 색 도리이(鳥居)가 물 위로 서 있는 게 희미하게 보인다.


 
 호수 주변을 따라 걸어간다. 여기서부턴 경사진 길이어서 본격적인 등산을 하는 느낌이다. 게다가 진창길이 된 탓에 자칫하다간 발이 빠지기 십상이다. 길을 따라가다보면 오른편으로 호수의 푸른 자태가 얼핏얼핏 드러난다.



 호수 맞은 편에 자리한 산장이 나왔다. 산장에는 명물인 죽순국을 팔고 있었다. 한여름의 난로 앞에서 진창에 빠져 축축한 신발과 배낭을 말렸다.

  시간이 지나도 비는 그칠 기미가 없다. 아직 남아있는 코스를 생각하면 자칫하다간 버스가 끊길 수도 있을 거 같다. 

  서둘러서 길을 나섰다. 축축한 신발을 신은 채 터벅터벅 걸었다. 고개를 넘자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앞쪽으로 목재 도리이(鳥居)가 보인다.

 도리이를 기점으로 길은 갈라진다. 도리이를 넘어서 쭉 가면 해발 2000미터 정도 되는 시가산으로 가는 길이다. 왼쪽으로 난 길에는 나무 벤치들이 놓여 있다. 벤치 앞으로 목도가 길게 이어져 있고,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다. 

 두 갈래 목도와 푸르른 평원과 연못. 오제에서 본 것과 비슷한 풍경. 시주하치이케(四十八池)다. 크고 작은 연못이 이름과 달리 60여개 산재해 있다고 한다. 시가산과 시주하치이케, 그리고 목도가 조합해낸 풍광에 피로가 가시는 느낌이다.


 시주하치이케를 지나면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연못이 또 하나 나타난다. 시부이케(池). 수수하면서도 묘한 느낌을 주는 연못이다.


  어디선가 스피커 소리가 들린다. 조금 걸어내려가 보니 리프트가 있다. 리프트를 타고 올라온 사람들이 고원을 둘러보고 있다. 이곳에 서서 바라보는 전망도 시원하다.

 

  리프트를 타고 아래로 내려간다. 버스를 타고, 또 갈아타고 해서 원래 출발지 쪽으로 돌아간다. 오늘 걸어온 시간만 5시간은 되는 것 같다.
 유다나카의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어둑어둑해졌을 때다. 제일 먼저 한 일은 온천에 몸을 담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