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여름 휴가를 얻어 나가노(長野) 일대를 둘러봤다.

 [도쿄 부라부라]의 범위를 도쿄 밖으로 넓힌 세 번째 시도. 그런데 역시나 비가 내렸다. 닛코(日光), 오제(尾瀨)에 이어 비의 ‘3연승’이다.
 아무리 올해 일본의 여름이 예년에 비해 비가 많이 내렸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하다 싶었다. ‘머피의 법칙’을 넘어서 ‘신의 법칙’이 아닐까 싶다. 차를 렌트해 도쿄를 출발할 때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렸고, 도쿄로 돌아올 때는 아예 번개와 천둥을 동반한 폭우가 내려 식겁했다.
 하지만 어쩌겠냐. ‘신의 법칙’이라면 따를 수밖에.

 그나마 이번 나가노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가미코치(上高地)를 둘러보는 날에만 딱 비가 그쳤다. 마지막 ‘신의 한 수’는 놓치지 않은 모양이다. 3000미터 가까운 산봉우리들 위로 파란 하늘이 눈부신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이번 [부라부라]는 이걸로 충분히 보상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계올림픽과 스키 리조트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나가노. 그 전모를 제대로 알기에는 기간도 짧았고, 둘러본 곳도 한정됐지만, 그래도 [부라부라] 출발이다.


 ■가루이자와(輕井澤)


 나가노현 남동부, 도쿄에서 신간센으로 1시간 정도 걸리는 가루이자와는 찾기 전부터 살짝 기가 질렸다. 하루를 묶어볼 요량으로 검색한 숙소의 가격들이 그야말로 장난 아니었기 때문이다(물론 잘 찾으면 싸고 괜찮은 숙소도 있을 거다).
 
 가루이자와는 19세기말부터 피서지로 개발된 곳으로, 일본 부호들과 유명 연예인의 별장이 위치하고 있다. 이르면 내년말 퇴위할 것으로 보이는 아키히토 일왕이 젊은 시절 미치코 왕비와 테니스를 즐기곤 했던 일본 왕실 휴양지이기도 하다.
 1886년 캐나다 출신의 성공회 선교사 A. C. 쇼가 가루이자와의 아름다운 풍광에 매료돼 2년 뒤 가루이자와 ‘1호’ 별장을 마련해 여름을 보낸 뒤 피서지로 수많은 저명인에게 알려졌다. 현재는 캠프장과 골프장, 온천, 쇼핑센터 등 관광시설이 정비돼 있어 피서지로서뿐만 아니라 사계절을 통해 휴양할 수 있는 일본 유수의 리조트로 변모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도착한 가루이자와.
 제일 처음 느낀 것은 공기가 서늘하다는 것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다곤 했지만, 점퍼를 껴입게 될 정도로 서늘했다. 가루이자와는 해발 약 1000m 전후의 고지에 있기 때문에 시원하다고 한다.

 가루이자와 중심지인 긴자(銀座) 거리를 ‘부라부라’. 지역특산품인 과일 잼이나 와인, 사케, 소시지 등을 파는 가게들과 아기자기한 선물 가게와 카페 등이 늘어서 있다.  빅토리아풍 옷을 입고 사진을 찍는 사진관도 눈에 띈다. 금방 관광버스가 도착했는지 일본인, 중국인 관광객들이 우르르 몰려 있다.



 이곳저곳을 구경하다보니 어느덧 길은 한적한 길로 바뀌어 있다. 뒤로는 초록을 잔뜩 인 이끼와 풀과 나무들이 풍요로운 풍광을 만들고 있다.

 

  길은 쇼 목사의 조각상이 맞이하는 쇼 기념예배당으로 통한다. 가루이자와에서 가장 오래된 성공회교회다. 20명이 예배를 볼 수 있을까 싶은 작은 목조 건물이다. 기독교 인구가 0.5%도 안 된다는 일본에서 가루이자와는 좀 독특하다. 긴자 거리에는 이곳 말고도 성 바울 성당과 가루이자와교회가 있다. 

 쇼 기념 예배당 뒤로는 쇼 하우스 기념관이 있다. 쇼 목사가 여름을 보냈던 별장을 복원한 곳이라고 한다. 2층짜리 목조 건물 안에는 당시 가재 도구들을 재현해 놓았다.



 쇼 하우스 기념관을 나와 조금 더 위쪽으로 걸어가본다. 다리를 건너자 갈림길이 나오는데 1시간 정도를 걸어가면 군마현과 경계를 이루는 우스이(氷峠)고개가 나온다고 한다. 너무 먼 듯해서 다시 긴자 거리로 돌아갔다. 성 바울 성당을 찾았다. 이곳도 자그마하다. 1920년대부터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성루가병원이나 구이탈리아대사관 별장 등수많은 건축물을 남긴 안토닌 레이먼드(Antonin Raymond)가 설계한 것이라고 한다. 


 
 근처 가게들을 좀 둘러보다가 점심 식사할 곳을 찾았다. 나가노는 어딜 가나 소바가 유명하다. 가루이자와에서 꽤 유명하다는 가와카미안이라는 소바집에서 30분 정도 기다린 끝에 식사. 소바는 잘 모르겠고, 함께 나온 튀김이 바삭바삭 맛있다.


 
 식사 후 시라이토(白絲) 폭포를 향해 출발했다. 긴자 거리에서 산쪽으로 이어지는 미사카 (三笠) 거리. 낙엽송들이 쭉쭉 뻗은 아름다운 길이다. 그 뒤로는 별장들로 보이는 건물들이 푸른 나뭇잎들로 둘러싸여 있다. 붉은색과 흰색이 섞인 건물이 보이길래 가봤더니 옛 미사카 호텔 건물이다. 1902년부터 1970년까지 실제 영업을 했다고 한다. 인근에는 카레와 빵을 파는 아담한 카페가 있다.



 구 미카사호텔을 지나면 구불구불한 고갯길이 이어진다. 한참을 가다보면 차들이 늘어서 있는 주차장이 나온다. 이곳에서 산쪽으로 조금 걸어올라가면 시라이토 폭포다. 활처럼 완만하게 굽은 암벽 위를 지하수가 흰색 실 타래처럼 떨어진다. 높이는 3미터 정도다. 가을이 되면 주변을 둘러싼 나무들이 아름답게 물들어 더욱 볼 만하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시라이토’라는 이름의 폭포는 일본 곳곳에 있다. 지난해 갔던 후지산 근처 후지노미야시에도 시라이토 폭포가 있었는데 규모 면에선 더 컸다. 일본인들에겐 폭포가 흰색 실처럼 떨어진다는 이미지가 강한 모양이다.



 시라이토폭포를 떠나 길을 잘못 들었는지 조금 헤맸다. 아사마(淺間)라는 이름을 단 건물들이 눈에 띈다. 아사마산. 1972년 이곳에 있는 아사마산장에서 일본 연합 적군이 경찰과 대치한 인질 사건이 있었다. 당시 조사 결과 연합 적군은 사상 무장을 이유로 대원 12명을 구타해 살해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일본에 큰 충격을 줬다.
 길은 여전히 험하고, 내비게이션을 봐도 대체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다.  괜히 으스스해진다.

 어느 순간 확 트인 고원이 나왔다. 주변에는 들판과 밭들이 펼쳐져 있다. 어린 학생들이 우루루 달리고 있다. 근처엔 잔디밭 운동장도 있다. 나중에 알아보니 우에다(上田)시로. 하계 훈련장이 많은 곳이다.

 나가노시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지고 있었다. 나가노 동계올림픽 경기장을 지나 역 근처 숙소에 도착했다. 나가노역에서 젠코지(善光寺)까지 이어지는 거리를 따라 부라부라. 이미 문을 닫은 가게도 적지 않다. 아쉬움이 컸지만, 이곳 지역 맥주를 사서 숙소로.



Posted by fontif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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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정송 2017.09.15 2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옥의티랄까 善光寺는 센코지가 아니라 젠코지 입니다.

    맥주에도-zenkoji- 젠코지라 제대로 인쇄가 되어있네요.

    일본어가 쉽다고 그러는데 엄청 어렵지요.

    통역시험에 합격한지 올해로 49년째인데 너무나 어렵다고 생각들때가 많더군요.

    말할때보다도 글을 쓸때는 더욱 신중하게 조사하고 써야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가보지도 않고 썼다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어요.

    어떤 변호사가 일본 온천에 관한 책을 썼는데 온천장 이름도 틀리게 썼더군요.

    아마도 그는 다녀오지도 않았다고 의심받아도 할말이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