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도쿄 통신

[도쿄 부라부라]비 내리는 오제 고층습원의 한 줄기 목도를 따라걷다

“그나마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천천히 둘러볼 수는 있겠네요.”

현지 일본인에게서 이 말을 또 들을 줄이야. 

4주 만에 감행한 [도쿄 밖 부라부라]도 ‘가는 날이 장날’, 또 비다.
무슨 '머피의 법칙'이라도 되는지 [도쿄 부라부라]의 범위를 도쿄 밖으로 넓힐 때마다 비가 내린다. 지난 번 도쇼구(東照宮)가 있는 닛코(日光)를 찾았을 때와 마찬가지.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지난 토요일 찾은 곳은 도쿄 중심부에서 170㎞ 정도 떨어진 오제(尾瀨)국립공원.
눈이 남은 산을 배경으로 화사한 꽃이 피어난 초원의 풍광을 담은 사진에 반해 벼르고 벼르던 곳이다.

모처럼 시간을 내서 어렵게 찾은 이상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런 오기와 ‘저 위쪽 날씨는 좀 다르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기대어 그대로 강행키로 했다. ‘100% 방수’는커녕 ‘100% 흡수’에 가까운 엉성한 옷차림-중간에 어설픈 비닐 우비를 사서 덮어쓰긴 했다-을 하고 출발.
 
오제는 군마현, 도치기현, 후쿠시마현, 니가타현을 아우르는 국립공원이다. 국립공원 특별보호지구와 함께 일본 특별천연기념물, 람사르조약 습지로 지정돼 있다. 일본 100대 명산에 속하는 히우치가타케(2356m)와 시부쓰산(2228m)에 둘러싸인 거대한 분지로 해발 1400m에 이른다. 특히 한가운데 있는 오제가하라는 남북 2㎞, 동서 6㎞에 이르는 혼슈(州·일본 열도 최대의 섬) 최대의 고층습원으로, 물파초와 각시원추리 등 다양한 고산식물을 볼 수 있는 곳이다. 1년의 절반 정도(4~11월) 그 신비로운 자태를 공개한다.
 
당일치기라는 조건과 비와 체력 등을 감안, 오제를 둘러보는 가장 일반적인 코스를 선택했다. 출발점은 도쿠라(戸倉). 도쿄 신주쿠에서 출발하는 버스가 이곳에 정차한다. 일반 자동차도 이곳에 주차를 하고 버스나 10인승 미니버스형 택시로 갈아타야 한다.
지난 번 닛코-오제에서 차로 1시간30분 정도 떨어져 있어, 닛코를 함께 둘러보는 티켓도 있다-와 마찬가지로 버스는 울창한 삼림을 뚫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을 한참을 올라간다.

20분 정도 달려서 도착한 곳은 하토마치(鳩待) 고개. 표고 1591m로 오제의 관문이다.  이곳에서 오제가하라 쪽으로 내려가거나 시부쓰산이나 인근 후지미 고개로 올라가는 길이 갈라진다.

오제가하라 쪽으로 가는 내리막길을 따라 간다. 아이와 함께 온 가족이 앞서가고 있다. 한동안 돌이 박힌 길이 계속되다가 어느새 목도(木道)가 이어진다.

목도는 오제의 식생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오제 전체에 퍼져 있다.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폭으로 두 줄로 이어진다. 드높은 하늘과 2000m가 넘는 산들, 다양한 고산식물, 초록의 습원, 그리고 그 위를 가로지르는 목도가 이뤄내는 별세계 같은 풍광이 오제의 매력이라고들 한다.

비는 계속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때때로 만나게 되는 계곡은 누런 물로 넘실거리고 있다. 앞쪽에서 '땡땡' 하는 소리가 들린다. 조그마한 종이 매달려 있는데 종을 울려서 곰이 접근하는 것을 막는다고 한다. 과연 이런 곳에 곰이 있을까 싶었지만.

40분 정도를 내려간 곳에 만나는 곳이 야마노하나 방문객 센터.

산(야마)의 코(하나)라. 오제가하라가 시작되는 곳이니 '코'라고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근처 야영장에는 텐트 10개 정도가 있다. 방문객 센터에선 이곳에서 잤는지 대학 초년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한창 장비를 손질하고 있다. 매점에서 우비를 구입해 입었다. 하지만 크게 소용은 없는 듯하다.

오제가하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전망이 확 트인다. 습원이 초원처럼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꽃들은 대부분 졌는지, 초록의 물결로 가득하다. 비가 내린 탓에 주변의 산들은 물안개에 싸여 뿌옇게 보인다. 이런 풍광이 오히려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오제에는 5월 하순부터 피는 하얀색 물파초와 7월부터 피는 노란색 각시원추리 등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난다. 이미 계절이 본격적인 여름으로 들어간 때문인지 꽃들의 군락은 눈에 띄지 않는다. 샛노란 각시원추리와 보라색 엉겅퀴 정도만 드문드문 눈에 띈다.


목도를 따라가다보면 중간중간 작은 웅덩이가 보인다. 이런 작은 연못을 지토라고 한다. 오제에는 이런 지토를 수없이 볼 수 있다. 하늘 빛을 반사하는 수많은 지토가 오제를 더욱 신비스러운 곳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우리 앞으로 짐을 잔뜩 실은 지게를 지고 가는 사람이 보인다. 오제에 있는 산장에 생필품을 나르는 '봇카'다. 잠깐 목도에 앉아 쉬는 뒷모습을 보니 목언저리가 비와 땀이 뒤섞여 번들번들하다. 이 봇카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가 한국에서도 EBS ‘길 위의 인생’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소개됐다. 일본에 왔을 때도 할아버지에 이어 봇카를 하는 젊은이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봤다. 이들은 많게는 100㎏ 가까운 짐을 싣고 10㎞ 가까운 거리를 걷는다고 한다.



눈 앞에는 한 줄기 목도가 줄곧 이어지고 있다. 이 목도 위를 걸어가는 봇카의 모습을 보면서 얼핏 삶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여기 오제의 대자연 아래에서 묵묵히 목도를 걸어가는 게 왠지 경이롭다. 오제가 다른 곳과 다른 경험을 선사하는 게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비가 조금씩 그치면서 주변 풍광이 조금 더 드러난다. 푸르른 들판에는 키가 낮은 고산식물을 제외하곤 자작나무 군락 정도만 눈에 띌 뿐이다. 앞서 가던 사람이 멈춰섰다. 도롱뇽을 발견한 모양이다. 도마뱀도 볼 수 있다.

초록으로 가득한 들판을 두 줄기 목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간다. 목도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 우시구비-이번엔 '소의 목'이다-를 지나 중간 반환점인 류구(龍宮)에 도착했다. '용궁'이라. 조금은 낡아보이는 산장이 덩그러니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1박을 할 수도 있다. 어둠이 찾아오면 또다른 모습을 보여줄 오제를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무 의자에 앉아 도쿠라에서 싸온 주먹밥을 우걱우걱 먹는다. 꽤 허기가 졌던 모양이다. 다른 사람들도 이곳에서 주먹밥 같은 걸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있다.

욧피 현수교에 들렀다가 다시 우시쿠비 분기점으로 향한다. 목재 벤치 주변에선 아이 2명을 둔 아빠 엄마가 햄에그 프라이를 만들고 있었다. 그 다음 만난 목재 벤치에는 중년 부부가 앉아서 보온병에 가져온 커피를 마시면서 눈 앞의 풍광을 보고 있었다. 이들 앞에는 작은 연못(지토)이 조용히 반짝이고 있었다.


다시 야마노하나에 도착. 아까와는 반대로 하토마치 고개까지는 오르막길이다. 빗줄기는 다시 굵어지기 시작했다. 비와 함께 흘러내리는 땀이 몸을 적신다. 헉헉대면서 1시간만에 하토마치고개 도착.

도쿠라로 내려가는 길. 이번엔 미니버스형 택시를 탔다. 택시는 사람이 채워지는 대로 출발한다. 도쿠라에 도착해선 젖은 옷도 갈아입을 겸 당일치기 온천에 들렀다. 온천물은 미끌미끌하다. 유황 냄새가 좀 난다. 목욕탕 안은 예닐곱명이 들어갈 정도로 좁다. 하지만 비에 젖은 몸을 따뜻하게 데우기는 충분하다.

계산해보니 17㎞ 정도는 걸었다. 소요시간은 5시간 정도.

비가 온 탓에 아쉬움도 많은 '오제 부라부라'였다. 당일치기라서 오제늪이나 산조노타키(폭포)까지는 가보지도 못했다. 비가 온 탓에 인근 산에 올라 오제가하라를 조망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래도 비 오는 날 오제를 둘러보는 경험을 언제 하겠냐 생각해본다. 다음에 기회가 온다면 산장에 묶고 좀더 느긋하게 오제를 둘러보고 싶다. 물론 두 줄기로 길게 뻗은 목도를 따라 '부라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