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게 딱 이 경우다.
2주 전, 도쿄를 벗어나 ‘부라부라(어슬렁어슬렁)’ 해보려고 도쿄 북쪽의 도치기현 닛코(日光)를 찾았다. 때마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도쇼구(東照宮)가 수리복원 공사를 거의 마치고 지난 3월부터 새로 공개됐다는 뉴스를 본 터였다.
그런데 열차가 아사쿠사역을 출발할 때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닛코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굵어졌다. 닛코에선 아예 비바람이 함께 몰아쳤다.
그런데 내리는 비를 어찌 하겠냐. “닛코역에서 도쇼구까지 가는 길이 1차선 도로라 주말에는 1시간 넘게 막힌다. 그런데 비가 온 덕분에 오늘은 안 밀린다”. 버스 기사의 낙천적인 말 그대로다. 몸을 겨우 가리는 작은 우산을 의지해 부라부라.
아사쿠사에서 특급열차를 타고 2시간 정도 가면 도부(東武) 닛코역에 도착한다. 비가 내리는 탓인지 역 앞은 한산하다. 닛코는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다는데 비까지 내리니 서늘하다 못해 싸늘하다.
도부 열차에서 판매하는 닛코 패스를 이용해 닛코를 둘러보는 길은 크게 세 가지인 모양이다. 온천과 강, 테마파크가 있는 기누가와(鬼怒川), 세계유산인 도쇼구, 그리고 도쇼구를 지나 더 깊숙한 곳에 있는 주젠지 호수와 게곤폭포 코스.
게곤폭포와 주젠지(中禪寺)호수를 먼저 찾기로 한다. 도쇼구 지구의 상징인 신쿄(新橋)를 지나쳐 버스가 구불구불 꺾어지는 길을 따라 한참을 간다. 이 길을 이로하자카라고 한다는데, 버스 기사(이 분 오늘 신이 나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그런지 재미있게 설명을 해준다)가 “이곳 단풍이 무척 아름다운데 역시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 아니면 엄청 막힌다”라고 한다.
주젠지 온천 역 도착. 오른쪽으로 가면 게곤폭포. 왼쪽으로 가면 주젠지 호수다. 먼저 게곤폭포로 향했다. 폭포는 위에서 봐도 되지만 입장료를 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아래 쪽에서 폭포가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주젠지 호수에서 흘러온 물이 100m 가까이 낙하하는 모습이 호쾌하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게곤(화엄·華嚴)’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모양인데 화엄 세계가 펼처지는 건 주변이 단풍이나 은색 눈으로 뒤덮인 때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곤폭포를 나와 반대편 주젠지 호수 쪽으로 걸어갔다. 몰아치는 비바람에 우산이 자꾸 뒤집힌다. 호수 주위에는 대사관 별장이나 불상 등 볼거리들이 적지 않다고 하는데 도저히 둘러볼 상황이 아니다.
선착장 쪽으로 가까이 가보니 오리배들만이 비바람을 맞으면서 서 있다. 아니다. 호숫가에는 이 와중에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이런 낚시광들은 또 다른 호수에서 발견하게 된다).
나중에 버스로 돌아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주젠지 호수는 유람선을 운행할 정도로 무척 넓다. 맑은 날에는 호수 뒤에 우뚝 솟은 난타이산(男體山)과 함께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고 한다.
주젠지 온천 역으로 돌아가서 잠깐 고민하다 난타이산 더 깊숙한 곳에 있는 유모토(湯元) 온천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삼림이 울창한 지역으로 점점 들어간다. 중간중간 호수나 폭포가 있다는 표시가 있다. 우비를 쓴 등산객들이 버스에 타곤 한다. 이들은 유모토온천에서 내려 어디론가로 향했다.
유모토 온천은 그야말로 ‘온천 관광지’인 듯했다. 주변에는 온천이 딸린 여관이 대부분이다. 딱히 할 일이 없어 근처에 있는 근처 유노코 호수를 잠깐 둘러봤다. 이곳에 아예 판을 벌이고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낚시에 흥미는 없지만, 비 오는 날 이런 한적한 곳에서 강태공 노릇을 하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마을 가운데에 족탕이 있길래 발을 담갔다. 비를 맞은 탓에 으슬으슬하기까지 하던 몸이 조금 훈훈해졌다. 희뿌연 온천수의 미끌미끌한 감촉도 좋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아마 여관에서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대나무를 빠져나오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여행의 피로를 풀 것이다.
닛코의 하이라이트라는 도쇼구로 향했다. 버스가 도쇼구 앞에 도착할 즈음 비가 조금씩 그치고 있었다.
도쇼구는 17~19세기 일본 에도시대를 연 도쿠가와 막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유골을 봉안한 곳이다. 1637년 손자 이에미쓰(家光)가 1637년 대대적으로 개수했는데 경내 곳곳에 새겨진 조각과 그림들은 일본 근세 미술의 백미로 꼽힌다. ‘닛코를 보기 전에는 아름다움을 논하지 말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이건 일본인 특유의 과장 표현법인 모양이다. 교토 우지의 뵤도인(平等院)을 두고도 같은 말을 하니까 말이다.
하늘 높이 솟아있는 오중탑을 옆으로 하고, 정문을 통과하면 제일 처음 만나는 것이 도쇼구의 상징 중 하나인 '세 마리 원숭이'다. 신을 태운다는 말을 두는 ‘신큐샤((神廐舍)’ 건물 위쪽에 장식돼 있는 원숭이 부조들 중 하나다. 각각 손으로 귀, 입, 눈을 가리고 있는 원숭이 세 마리의 모습인데 나쁜 일을 “보지 않고, 말하지 않고, 듣지 않는다”는 불교 교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세 원숭이 외에도 신큐사에는 8개의 원숭이 부조들이 있는데 인간의 일생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번에 수리복원 작업을 한 덕에 색깔이 무척 선명하다.
신큐샤 맞은 편 계단 위로 국보 요메이문(陽明門)이 서 있다. 금색과 극채색을 섞어 놓은 조각들이 화려하다 못해 눈부시다. 관광객들이 이 앞에서 한동안 조각들을 올려다보고 있다. 요메이문의 별칭이 해가 지는 줄 모르고 바라본다는 뜻의 ‘히구라시(日暮)문’이다. 이 표현도 일본의 단골 표현인 듯. 교토 니시혼간지에 있는 가라몬(唐門)도 그 아름다움 때문에 같은 별칭으로 불린다.
요메이문에는 모두 508개의 조각들이 새겨져 있는데 성인이나 현인, 아이들의 놀이 등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이 중에는 현대의 이지메 문제와 관련되는 것처럼 보이는 조각도 있다고 한다. 때리는 아이를 말리는 아이와 이를 못본 체 하는 아이의 모습이 있다고 한다.
요메이문 좌우에 길게 늘어서 있는 회랑(廻廊)에도 꽃과 새 조각이 극채색으로 장식돼 있다.
요메이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가면 사카시타몬(坂下門)이 있는데 이 문 위로 또 하나의 도쇼구의 상징이 장식돼 있다.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듯한 모습의 고양이 조각이다. 이 문을 지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통하는 걸 봐선 고양이가 수호신 격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는 모양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이 있는 오쿠미야(奧宮)로 향하는 길. 이끼가 낀 돌 난간이 정갈하게 늘어서 있어서 다른 느낌을 준다. 신사에 대해 꺼림직한 느낌을 갖다가도 이런 풍광을 보면 그런 느낌이 조금은 풀어지게 된다.
다시 본전 쪽으로 돌아온다. 본전은 신발을 벗고 둘러볼 수 있게 돼 있는데 이렇게 개방하는 경우는 드문 게 아닐까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신으로 모시는 곳이니 더 가까이서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요메이문을 다시 빠져나오면 오른쪽에 건물이 하나 있는데 절(관광객들을 상대로 설명을 해주는 스님(?)이 이곳은 신사가 아니라 린노지(輪王寺)에 속한 절 건물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한다)이 있다. 이 건물 천장에는 거대한 용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용의 이름이 ‘우는 용(鳴龍)’이다. 용 그림 아래에 서서 소리를 내면 이곳만 묘하게 메아리가 울려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스님이 실제 시험을 해보이는데 신기하긴 하다. 이 분은 곧이어 행운을 주는 ‘우는 용’ 부적을 판매한다고 재빨리 선전한다.
도쇼구를 나와 기업이나 마을 자치회 등이 기증한 석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길을 따라 가면 후타라산신사(二荒山神社)가 나온다. 사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는 도쇼구와 함께 인근 후타라산신사와 린노지까지 포함된다.
거대한 나무를 뒤로 한 채 신사 건물이 조용히 늘어서 있었다. 이 신사는 인연을 이어주는 곳으로 유명한 모양이다. 신사 앞에는 짚으로 짠 커다른 고리가 세워져 있었는데 이곳을 세 번 통과하면 모르는 사이 더해진 죄가 없어진다고.
또 도쇼구 옆에는 766년에 창건됐다는 린노지(輪王寺)가 있다. 그런데 이곳도 개관시간이 거의 다 지났다. 게다가 공사 중이다. 그런데 역시 일본답게 린노지 본당을 가려놓은 임시가설물에 그 모습을 그대로 찍어 놓았다. 심지어 공사하는 모습을 들어갈 수 볼 수 있도록 했다. 6년 전 효고현 히메지성을 보러 갔을 때도 이런 식으로 관광객의 아쉬움을 채워주고 있었다. 린노지를 나오자 이곳을 개창했다는 쇼도쇼닌(勝道上人)의 동상이 우뚝 서서 떠나는 길손을 배웅하고 있었다.
도부 닛코역으로 돌아오자 비는 완전히 그쳤다. 구름 사이로 저물어가는 해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도부 닛코역은 커다란 삼각형 지붕을 이고 있는 게 알프스의 어느 산장 같다. 이곳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나오는 JR 닛코역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서양식 목조 건물로 석양을 받아서 분홍색 외관이 더욱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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