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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이타 사건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일본

 패전후 일본 현대사에 대해선 모르는 부분이 꽤 많다. 그것이 한반도와 관련된 사건인 경우에도 말이다.
 스이타(吹田) 사건도 그 중 하나다.
 1952년 6월 24일 일본 노동자와 학생, 재일조선인이 오사카부 스이타시에서 일본의 한국전쟁 협력에 반대하면서 벌인 사건이다. 당시 ‘조선동란 2주년 기념 전야제·이타미 기지 분쇄, 반전·독립의 밤’에 참가했던 시위대가 일본공산당 지도하에 국철 스이타 조차장까지 시위 행진하면서 경찰과 충돌했다. 111명이 소요죄·위력업무방해죄 등의 혐의로 체포·기소됐다. 소요죄 무죄 판결을 받게 되는 1972년까지 재판에 걸린 기간만 19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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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 싸운 한국전쟁의 날들-재일조선인과 스이타 사건>(니시무라 히데키, 심아정·김정은·김수지·강민아 옮김, 논형)은 스이타 사건을 추적하는 동시에 일본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밝혀낸 책이다(원제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일본’이다 ). 스이타 사건이 당시 일본인과 재일조선인이 벌인 한국전쟁 반대운동이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실제 일본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후방기지 역할을 했다. 미 공군은 이타미 기지에서 B29를 한국으로 보냈고, 무기·탄약이 국철 스이타 조차장에 집약됐다. 책은 한국전쟁 시기 일본이 기뢰 제거를 위한 소해정을 보내고 적십자사 간호원을 파견하는 등 사실상 ‘참전’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전쟁 포기와 전력 불보유를 규정한 일본 평화헌법 9조를 위반하는 것이다.

 야마구치(山口)현사(史)에 실린 ‘한국 망명정권 6만 명 이주계획’이라는 것도 있었다(이하 책 인용).
 한국 정부는 처음에 서울에서 대전, 대구, 부산으로 수도를 이전했고 8월 하순에는 인민군이 한국의 대부분을 제압했다. 그때, 일본의 외무성으로부터 야마구치현청으로 ‘한국 정부가 야마구치현에 6만 명의 망명정권 설치를 희망’이라는 전보가 왔다. 당시 야마구치현은 현민들을 대상으로 한느 배급 쌀도 보름 이상 지연된 상황이어서, 6만 명의 식량 확보는 어렵다며 곤혹스러워했다.

 사실 한국전쟁은 전후 일본 부흥에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실제 당시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반응이 이를 웅변한다.
 
 오전 8시 30분경, 도쿄의 GHQ(연합국군 총사령부)에 최초의 보고가 올라왔다.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수상은 한국전쟁 발발의 첫 보고를 받고 가미다나(집안에 조상신을 모셔놓은 제단) 앞으로 가서,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내려주신 축복입니다. 부디 굽어 살펴주시기를…’이라고 읊조리며 깊이 머리를 숙였다고 한다. 요시다 시게루의 관심사는 일본의 독립이었다. 그의 눈에는 이웃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 일본의 독립을 위한, 그리고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피폐해진 일본경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였다.

 스이타 사건은 같은 해 5월1일 도쿄 메이데이 사건, 7월7일 나고야 오스 사건과 함께 일본 3대 소요 사건으로 불린다. 세 사건 모두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주권을 회복한 4월28일부터 파괴활동방지법이 본격 시행되기까지 불과 2개월여 동안 집중돼 있다. 3대 소요사건은 그때까지 진행되어오던 민주화정책이 ‘역코스’에 의해 냉전체제하에서 국가주의적인 방향으로 변화하던 시기에 일어났다.

 이하도 책에서 발췌.

 대일본제국 정부가 천황제 존속을 위해 시간을 끌지 않고 7월말에 포츠담 선언을 바로 수락했더라면, 히로시마·나가사키의 20만명이 넘는 희생자는 생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반도가 미·소에 의해 분단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한반도 분단의 직접적인 책임은 미국과 소련에 있지만, 전후 처리에 미숙했던 일본에도 커다란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 내부에서 포츠담선언에 천황제 존속보전의 내용이 없다는 문제를 둘러싸고 엄정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결국 ‘언급하지 않음’과 ‘묵살’할 것을 결정했다. 이 ‘묵살’을 신문사나 통신사가 ‘거절’로 보도하여 연합국은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거부’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일본 정부 지도부의 애매한 태도가 한반도의 분단과 함께 커다란 비극을 초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