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들어 도쿄는 30도 가까운 더위가 이어졌다.
그것도 모르고, 고라쿠엔 야구장으로 익숙한 고라쿠엔(後樂園)을 부라부라.
우선 고라쿠엔에 가까운 분쿄구(文京區) 시빅 센터(구청사)에 들렀다. 이곳 25층에 전망대(무료다)가 있다. 신주쿠(新宿)-분쿄구는 신주쿠와 면해 있다- 고층 빌딩, 그리고 스카이 트리가 보였다. 날이 맑으면 멀리 후지산도 보인다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롯본기의 모리 타워도 그렇지만,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가슴을 벅차게 하면서도 왠지 숙연한 느낌을 준다. 인간이 만들어낸 건물과 도로들이 이뤄내는 기묘한 조화. 옆에서 노부부와 딸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이곳저곳을 가리키면서 풍광을 바라보고 있다. 어디 추도식이라도 갔다왔는지 모두 검정색 옷 차림이다.
시빅센터 바로 옆은 도쿄돔시티다. 옛 고라쿠엔 구장을 일본 최초의 돔 구장으로 개장한 도쿄돔과 종합유흥시설인 라쿠아 등으로 구성돼 있다. 라쿠아에는 대관람차와 제트코스터가 있다.
점심 때가 지나가고 있었다. 전망대에 있는 분쿄구 관광안내서를 하나 집어들어 그 중에 한 곳을 찾아가기로 했다. 시빅센터 맞은 편 언덕을 올라 주오대(中央大)를 지나 덴츠인(傳通院) 사거리에 있는 만세(萬盛). 4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소바집이다. 일단 잘 몰라서 자루소바를 시켰는데 면발이 깔끔하다. 유부를 잘라서 면 위에 올려주는데 짭짤한 게 면과 잘 어울린다. 라고 쓰고 있지만, 원체 미각이 둔해서 더 이상은 표현 불가능.
배도 꺼트릴 겸 덴츠인을 가봤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생모 등 에도시대 도쿠가와 쇼군가의 여성들이 잠들어 있는 사찰이라고 하는데, 건물 자체는 최근 새로 개수한 것처럼 보인다. 노인 10여분이 사찰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고라쿠엔을 비롯해 에도시대 건축물 탐방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본래 목적지인 고라쿠엔으로 향했다. 입구에 있는 긴 의자들에는 외국인 관광객을 비롯해 꽤 많은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앉아 있었다.
고라쿠엔은 오카야마(岡山)의 고라쿠엔과 구별해 고이시카와(小石川) 고라쿠엔이라고도 한다. 1629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11남인 미토(水戶) 번주 요리후사(賴房)가 공사에 착수해 2대인 미쓰쿠니(光國) 때 완성됐다. 미쓰쿠니는 일본에선 ‘천하의 부장군 미토 고몬(水戶黃門)’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유학을 장려하고 존황 정신을 고취함으로써 훗날 메이지(明治) 유신의 정신적 원류로도 일컬어진다.
실제 고라쿠엔이라는 이름은 중국 북송(北宋) 때 범중엄(范仲淹)이 지은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나오는 ‘선우후락(先憂後樂)’, 즉 ‘근심할 일은 남보다 먼저 근심하고 즐길 일은 남보다 나중에 즐긴다’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고라쿠엔은 연못을 중심으로 한 회유(回遊)식 정원이다. 일본의 명승지-특히 교토-를 축소해 조경하고, 중국 명나라 유신(遺臣)으로 에도에 와있던 주순수(朱舜水)의 의견을 받아들여 중국의 정취도 담았다. 정원을 한 바퀴 둘러보는 것으로 교토와 중국을 구경한 듯한 느낌을 담겠다는 뜻이었던 모양이다.
맨 오른쪽 건물이 도요타 본사라고 한다. 제일 위층이 회장실이다. 아마 회장실에선 고라쿠엔이 꽤 잘 보일 듯.
마침 자원봉사 할아버지가 가이드를 해주고 있어서 관광객 무리에 슬쩍 끼어들어 따라가봤다.
고라쿠엔에는 교토의 명승지를 본뜬 조경물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아래는 흔하디 흔한 다리로 보이지만, 교토 아라시야마의 도게츠(渡月) 다리를 축소한 것이라고 한다. 전쟁 때 불타 없어졌지만 교토 기요미즈테라(淸水寺)의 목조구조를 본뜬 조형물도 있었고, 교토 도후쿠지(東福寺)의 붉은 다리인 쓰텐교(通天橋)를 본뜬 것도 있다.
앞서 말했듯 중국풍 조경물도 보이는데 중국 항저우(杭州) 서호(西湖)의 둑을 본뜬 둑이 대표적이다. 서호의 둑은 2.8㎞라고 하는데 이 둑은 100분의 1이나 될까. 그 아래 사진은 엔게쓰쿄(円月橋)인데 주순수에 의해 설계됐다고 한다. 수면에 비친 모습이 보름달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도쿠진도(得仁堂). 고라쿠엔을 완성한 미쓰쿠니가 18살 때 사기의 ‘백이열전’을 읽고 감명을 받아 백이·숙제의 상을 안치한 곳이다. 백이, 숙제는 알다시피 왕위를 서로 양보하고 수양산에 은거하여 나물을 캐먹고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왜 미쓰쿠니에게 감명을 안긴 것일까. 미쓰쿠니는 젊었을 땐 꽤 방탕했던 모양이다. 셋째였던 그는 큰 형을 제치고 번주 자리를 물려받았다. 숙제 역시 셋째였지만, 미쓰쿠니와는 달랐다.
다이센스이(大泉水)라는 연못 주변을 걷다보면 수많은 꽃과 나무들을 볼 수 있다. 창포밭이 꽤 넓은데 꽃은 몇 포기 보이지 않는다. 창포 옆은 등나무 시렁이 있는데 높이가 사람 키보다 낮다. 지금과는 달리 에도시대 때 등꽃을 즐기는 방법은 등나무 아래 앉아서 즐기는 것이었다고 한다.
고라쿠엔은 원래 미토 번주의 저택 안에 지어진 정원이다. 일종의 접객용 정원인 셈이다. 그래서 고라쿠엔 안쪽에는 개인 정원인 우치니와(內庭)가 따로 있어서 사뭇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곳에서 자연석과 가공석을 정교하게 조합한 돌길을 따라 걸어나가면 다시 연못이 보이는 풍광을 만나게 된다. 다이센스이로 불리는 이 연못도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을 본떠 만들었다. 옛날에는 이 연못에서 뱃놀이를 하면서 수면에 비친 달을 보는 '쓰키미(月見)'를 즐겼다고 한다.
고라쿠엔의 낮은 언덕을 따라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낯선 새 소리가 들린다. 저 아래 개울에서 서늘한 바람이 나무 사이를 빠져나와 몸을 살짝 휘감는 느낌이 가슴을 흔들 만큼 신선하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있는 중년 부부의 모습이 정겹다. 고라쿠엔. 소나무 아래에 앉아 한낮의 더위를 피하면서 그냥 주변 경치를 바라보는 잠깐의 ‘망중한’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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