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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통신

벚꽃이 피는 계절에 돌아오길

일본의 4월은 벚꽃구경, 하나미(花見)로 기억된다. 

<러브 레터>로 유명한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가운데 <4월 이야기>가 있다.
좋아했던 선배를 따라 도쿄의 대학에 진학하게 된 홋카이도 출신 여자 신입생 이야기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아주 단순한 스토리 같은데, 실제로 영화는 그녀가 대학 생활에 적응해 나가고, 그토록 보고 싶었던 선배를 만나 뭔가가 시작되려고 하는 순간에 끝난다. 
처음 봤을 때 '이걸로 끝이야?'라고 어리둥절했을 정도로 러닝타임이 1시간을 겨우 넘기는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4월이 주는 '처음'이라는 느낌-한국과 달리 일본은 신학기가 4월에 시작된다-을 영상에 잘 담아내고 있다. 
20년 가까이 정들었던 가족들과 헤어져 낮선 도시에 도착하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 소개를 하고, 낯선 거리를 기웃거리고...
주인공의 모습은 내 대학 신입생 시절과 그렇게 멀지 않아 보였고, 1년간의 일본 생활을 막 시작한 지금의 내 상황과 닮은 부분도 있다. 
이 영화가 주인공의 사랑이 막 시작되려는 순간에 끝나는 것도 바로 그 '처음'에 집중하려는 의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이 영화는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일본의 4월 이미지가 더 뇌리에 남는 영화다. 
얼마전 DVD를 다시 봤는데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는 가운데 전통예복을 입은 신부가 걸어가는 장면은 여전히 인상적이었다. 

6년전 블로그에 썼던 글을 다시 본 건 오늘이 4월의 첫날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동네 지리도 살필 겸 나간 산책길에 벚나무 밑에서 '하나미'를 하고 있는 일본 사람들을 봤다. 

와세다대에 가까운 도야마(戸山) 공원에서다. 

오늘 도쿄 날씨가 가랑비가 흩뿌리고 꽤 쌀쌀했는데도 하나미를 포기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벚꽃이 만개하려면 일주일은 더 기다려야 할 거 같은데. 

꽃망울을 잔뜩 품은 벚나무 밑에는 얼굴이 벚꽃보다 더 붉은 사람들이 맥주캔을 하나씩 들고 웃고 떠들고 있다. 

6년 전이나 지금이나 혼자 도쿄로 넘어와 맞는 첫 주말에 '부라부라'(어슬렁어슬렁) 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도쿄에 온 지 나흘째다. 

평일은 짐 정리, 새 집 적응, 각종 등록 등을 하느라 의외로 바빴다. 

관공서나 은행 같은 데가 늦게 문을 열어 일찍 문을 닫으니 바삐 움직인다고 해도 하루에 처리할 수 있는 일은 한두 건밖에 되지 않는다. 짧은 일본어와 한국과는 다른 제도 때문에 같은 곳을 몇 차례 찾기도 했다. 

하긴 출발 때부터 우여곡절이 좀 있었다. 

기록 겸해서 정리해보자면,

1. 수요일 

김포공항에서부터 수화물로 부치는 캐리어가 무려 7킬로그램 중량 초과. 급한 대로 가방에 짐을 나눠서 넘김. 이게 나중에 화근이 됨. 무거운 짐을 들고 집까지 가느라 땀 뻘뻘. 도쿄 전철 갈아타는 거리가 한국보다 길고, 에스컬레이터가 없는 곳도 많음. 덕분에 이두박근이 꽤나 단련됐음 

여하튼 새 집에 도착. 부동산에서 미리 가르쳐준 대로 '비밀장소'에서 열쇠를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정말 휑하더라. <4월 이야기>의 여주인공처럼 캐리어 옆으로 쓰러질 뻔. 

문제는 그 다음. 이삿짐은 2주 뒤에나 도착하기 때문에 이불이고 식기고 뭐고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주변 사람들에게 농담처럼 말했던 침낭을 들고 온 게 그나마 다행. 이날 가스 개통하러 온 직원 왈, 유카단보(온돌과 비슷)는 다음날 된다고. 6년 전 경험도 있고 해서 에어컨을 난방으로 틀었지만, 역시 일본 집은 춥다.  

와중에 인터넷 접속 시도. 그런데 인터넷 신청을 해야 한다고. 그런데 어떻게 하냐고. 

하늘이 도와주셨는지 이날 하루 유일하게 와이파이가 희미하게 잡힘. 옆집에서 누가 쓰는지. 핸드폰으로 인터넷 신청(다음날 개통된다고).


2. 목요일

일단 우체국부터 찾아가 6년 전 썼던 예금통장을 쓸 수 있냐고 하니까 된다고. 하더니 지금 사는 곳이랑 주민등록표상 사는 곳이 달라 뒤늦게 안된다고. 그리고 월세 이체 용지도 우체국 용이 따로 있다고. 

그래서 꽤 멀리 떨어진 주민센터로 달려가서 주민등록 이전. 그 와중에 맨션 관리사무소 가서 우체국용 이체 용지 받음. 다시 우체국으로 가서 예금통장 복구. 

신주쿠 빅카메라 도착. 일단 드라이어기를 하나 사고. 핸드폰 개통 시도. 예전에는 없던 와이모바일이니 빅심이니 하는 저가 핸드폰 업체들이 있음. 그래도 예전에 썼던 소프트뱅크를 찾아갔으나, 한국에서 핸드폰을 가져왔다고 하니 와이모바일로 데려감. 상당히 전문용어를 섞어가며 설명하는 직원, 그리고 옆에서 패키지로 인터넷을 싸게 쓸 수 있다고 또 전문용어를 섞어가며 설명하는 또다른 직원, 그걸 다 알아듣는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나. 결과는 그냥 제일 간단한 요금제로 결정. 

도쿄가스 직원이 5시쯤 온다고 해서 급히 집으로 돌아감. 도쿄가스 직원은 5분만에 유카단보 개통. 바로 시험해봄. 역시 바닥이 따뜻해야. 

어제 신청했던 인터넷도 개통됨. 

어, 나, 의외로 잘하는데. 


3. 금요일

특파원 선배가 말한 것도 있고 해서 오늘 한국 운전면허증 교체 신청까지 다 해보기로. 그런데 블로그 보니 필요한 서류들이 꽤 많은 것 같아서 살짝 걱정. 되든 데까지 해보기로. 

일단 주민센터 가서 주민등록표 부본 하나 뗀 뒤, 아자부주반에 있는 주일 한국대사관 영사과 찾아감. 이곳에서 운전면허증 공증받고 나서 한국인으로 보이는 직원에게 물어보니 블로그에 나온 것보다 필요한 서류가 적음. 주민등록표, 여권, 운전면허증, 공증받은 서류, 사진 정도 필요하다고. 직원 말로는 도쿄 남부에 있는 운전면허센터보다 동쪽인 고토구에 있는 운전면허센터가 덜 붐빈다고. 어차피 11시부터 1시까지는 안한다고 하니. 하나은행 가서 통장 개설하기로. 

최신글이 아닌 블로그 글을 본 탓에 바로 옆 건물을 두고 헤맴(아마 하나은행이 이전한 듯). 하나은행 갔더니 마이넘버(주민등록번호 비슷)가 아직 안 나왔다고 통장은 만들어주는데 마이넘버를 반드시 알려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한국에서 송금 못받을 수 있다고. 

일단 통장 개설하고 고토구 운전면허센터로. 그런데 여기가 블랙홀일 줄은. 하루 걸렸다는 선배 말이 과장이 아니었음. 정확히 1시에 맞춰 도착했는데 서류 내려고 기다리고, 서류 내고 기다리고, 간단한 시력 검사 하고 기다리고, 마지막 운전면허증 받는 거 기다리고... 그러느라 5시가 넘어서야 끝남. 면허센터를 나오니 바깥은 어느새 비. 

집에 와선 인터넷 통해 신문 신청을 해봄. 1주일 무료로 시험구독할 수 있다길래 그걸 시험삼아 신청해봄. 근데 이게 화근이 될 줄 몰랐음. 


4. 토요일

새벽 4시인지 5시인지 바깥이 아직도 깜깜한데 인터폰이 울림. 

비몽사몽으로 화면을 보니 알 수 없는 검은 물체가 보임. 맨션 1층 입구에서 누군가 벨을 눌렀나 생각하던 차에 퍼뜩 든 생각이 혹시 신문 배달원? 맨션 입구에서 문을 열어달라고 인터폰을 눌렀나라는 황당한 생각을 함. 

그러다가 지금 집처럼 입구에서 자동문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놓은 곳에선 신문을 어떻게 배달하지, 입구에 있는 편지함에 넣고 가나. 신문을 여러 개 신청했는데 편지함에 다 들어가지 않을 건데, 아침마다 1층까지 내려가서 신문을 가져와야 하나, 각종 쓸 데 없는 생각들을 하면서 잠을 설침. 

그러나 아침에 이 같은 백팔번뇌는 사라짐. 1층에 가보려고 현관문을 열어보니 현관문 벨 누르는 곳에 2종의 신문이 꽃혀 있음. 요미우리와 산케이. 의문이 풀림. 어제 인터폰이 울린 건 1층 현관이 아니라 집 현관 인터폰임. 아마 신문을 꽂다가 잘못 누른 모양. 한국이나 일본이나 '배달의 기수'들은 아파트 자동문의 암호야 쉽게 해제해버리는 건 마찬가지인 모양.   

토욜은 어차피 관공서 같은 데가 쉬니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어 빈둥거림.

생각난 김에 외국인기자등록증 신청을 위해 필요한 서류 작성하고 사진 찍어서 파일로 만들고 놀았음.   

새로 받은 휴대폰 전화번호와 인터넷전화번호 외우기에도 도전. 나이가 들면서 뇌세포가 죽었기 때문인지 20년 넘게 익숙한 전화번호를 버리고 새로운 번호를 외우는 게 여간 쉽지가 않음. 이면지에 몇 십번을 썼는데 지금도 가물가물함. 

산책 갔다와선 신문을 좀 보고 일본 인터넷방송을 봄. 

요미우리와 산케이는 박근혜 전 대통령 구속이 국민 여론에 편승한 결정이라고 비판-언제는 박 전 대통령을 그렇게 비판하더니. 세월호 7시간 보도로 박 대통령과 악연이 있는 가토 다쓰야 산케이 전 서울지국장은 박 전 대통령 탄핵 과정을 축제나 연극구경이라고 칭하면서 축제의 끝에는 반일 축제가 남는다고 주장. 요미우리도 박 전 대통령 구속 이후 위안부 합의가 없었던 일로 될 것을 우려. 

더 가관인 것은 아메바TV에서 한 2시간 생방송 토론. 짧은 일본어라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재일한국인 언론인이라는 사람이 자민당 의원이나 언론인과 함께 북핵 위협을 강조. 거기에 보수 컬럼니스트입네 하면서 젊은 패널들(모두 여성이다)이 가세. 

북핵에 대한 일본의 위기감은 잘 알겠는데 듣기 거북한 발언들도 심심찮게 나옴. 박 전 대통령 구속을 두고 한국은 대통령들이 모두 말로가 안 좋다고 말하는 것을 넘어 '히스테릭한' 나라라고 하지를 않나, 유력 대통령 후보를 두고 '종북'이라는 말을 버젓이 쓰지를 않나.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새로운 대북정책으로 고려할 수 있는 게 김정은 참수작전이라는 말까지. 공중파에서도 제법 나오는 사회자가 북핵 대응이 자칫 핵, 무기 경쟁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우려한 게 그나마 다행인가. 

일본에서 맞은 첫 주말 밤이 왠지 찝찝하게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