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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김진우의 도쿄 리포트

아베 정권과 '인상 조작'

 “인상 조작이다.”
 지난해 상반기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국회 답변에서 자주 입에 올렸던 말이다.
 아베 총리와 부인 아키에 여사의 연루 의혹이 제기된 ‘학원 스캔들’이 재차 불거졌을 때였다. 아베 총리는 친구가 이사장인 가케학원의 수의학부 신설 특혜 의혹을 제기하는 야당에게 “인상 조작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모리토모학원에 대한 국유지 헐값 매각 의혹을 두고도 “나와 아내는 관계없다. 인상 조작”이라고 했다.
 일본어사전에는 ‘인상 조작’을 “정보를 취사선택해 상대방이 받아들이는 인상을 제어하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단편적으로 전해 여론을 유도하는 것”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야당이 사실을 과장·왜곡해 자신에게 의혹이 있는 것처럼 조작하고 있다고 반박한 것이다. 반면 어떤 의혹이든 ‘인상조작’으로 몰면서 야당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않고 거꾸로 야당을 공격하는 아베 총리의 기교라는 지적도 적지 않았다.
 아베 총리가 ‘인상조작’의 피해자 행세를 했지만, 기실 아베 정권은 ‘인상 조작’을 누구보다 능수능란하게 구사해온 것으로 평가된다. 지난달 30일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나온 뒤 일본 정부의 대응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일본 정부는 “폭거”, “국제질서 도전”이라는 거친 표현을 써가면서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징용공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결’이 됐기 때문에 판결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도 “개인 청구권 자체가 소멸된 건 아니다”라는 입장을 표명한 사실은 부각시키지 않고 있다. 고노 다로(河野太郞) 외무상은 지난 14일 일본공산당 의원의 추궁에“개인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다”라고 마지 못해 인정하면서도 “개인 청구권을 포함한 한·일 간 재산 청구권 문제는 협정으로 해결이 끝났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일본 정부는 또 이번 판결에 대해 “국제법에 비춰 있을 수 없다”고 반발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국제법을 말하는지는 얼버무리고 있다. 행정부가 체결한 협정이 헌법에 비춰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최종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사법의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폭거” 운운하는 것이 합당한 지도 의문이다. 일본 정부의 입장을 지지하는 일본 언론들은 “사실 왜곡”이니 “반일 내셔널리즈 영합”이라고까지 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판결 이후 지금까지 써오던 ‘징용공’이라는 표현을 ‘옛 한반도 출신 노동자’로 바꿨다. 당시 국가총동원법 국민징용령에 따르면 노동자 충원 방식은 모집과 관(官) 알선, 징용이 있었고, 이번에 소송을 제기한 피해자들은 자발적으로 모집에 응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동원 과정의 강제성을 물타기하려는 것이다. 당시 모집과 관 알선도 사실상 국가에 의한 강제동원에 다름 아니었다. 판결에도 적시됐듯 모집광고의 달콤한 말과는 달리 동원된 이들은 혹독한 취급을 받으면서 중노동에 시달렸다. 다나카 히로시(田中宏)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는 도쿄신문에 “이런 잔재주 논의는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라고 했다.
 그러고보니 ‘잔재주’로 보이는 게 또 있다. 일본 정부는 미국과 양자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응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 ‘물품무역협정(TAG)’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정작 지난 12일 일본을 방문한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에 “FTA 협상”이라고 했다. 
 최근 북·일 극비 접촉 뉴스가 일본 언론을 통해 나왔다. 올해만 세 번째다. 접촉이 활발한 것일 수 있지만, 결과가 ‘제로’라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기장 밖으로 밀려났다”는 지적까지 받았던 아베 총리가 ‘뭔가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효과는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