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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김진우의 도쿄 리포트

재일동포 할머니들의 '고향의 봄'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지난 8일 일본 가나가와(神奈川)현 가와사키(川崎)시 사쿠라초등학교 강당에 ‘고향의 봄’이 울려퍼졌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 40여명이 함께 입을 모았다. 휠체어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할머니들도 있었다. 재일동포 고령자 모임인 ‘도라지회’ 창립 20주년을 맞아 마련된 마당극을 여는 노래였다. 마당극 제목도 ‘고향의 봄 2’.
 ‘도라지회’는 1998년 1월 가와사키 후레아이칸(교류관)에서 글을 배우던 할머니들의 교류의 장으로 시작됐다. 매주 수요일 사쿠라초등학교 한편을 빌려 한국 요리나 노래, 춤을 즐긴다. 고립감을 느끼기 쉬운 할머니들이 서로 흉금을 터놓고 위안을 얻는 곳으로 자리잡았다. 현재 등록 회원은 110명.
 마당극에 앞서 후레아이칸 30주년 및 도라지회 20주년 기념식도 열렸다. 후레아이칸은 재일 인권운동가 고(故) 이인하 목사(1928~2008년)의 주도로 1988년 설립된 다문화 복지시설이다. 후레아이칸과 사쿠라초등학교가 자리한 사쿠라모토(櫻本) 지역은 재일동포들이 많이 모여사는 곳이다.
 이날 마당극은 일제 시대와 태평양 전쟁, 해방 등 굴곡의 역사를 살아온 재일동포 할머니들의 체험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총 4마당에 걸쳐 할머니들의 연기와 노래, 춤이 펼쳐졌고, 중간중간 할머니들이 꼭꼭 눌러쓴 ‘개인사’가 소개됐다.

 섣달 그믐밤 어머니가 만들어준 치마저고리를 껴안고 자던 ‘고향’의 기억, 일제의 공출을 피해 쌀을 숨기다 발각된 아버지가 끌려간 일, 가난을 피해 혈혈단신으로 바다 건너 일본으로 온 일, 어떻게든 살기 위해 한 잔에 40엔 하는 막걸리 가게를 열고 일본인이 먹지 않던 소 내장을 구해 야키니쿠(숯불고기) 가게를 한 일…. 할머니들의 질곡많은 삶에 눈물을 훔치는 관객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마당극에선 억척스럽게 역경들을 이겨낸 할머니들의 모습이 빛났다. 최고령자인 조정순 할머니(94)는 탄광촌에서 다이너마이트를 나르던 일을 담담하게 증언하면서도, ‘살아서 다행’이라는 의미로 몇 번이나 했던 한국말로 “아이고 참 좋다”를 외쳤다.
 각 마당을 알리기 위해 한 할머니가 손팻말을 들고 엉덩이 춤을 추자 관객석에선 “예뻐요”라는 말이, 할머니 10여명이 ‘노들강변’에 맞춰 부채춤을 추자 “멋지다”라는 환호가 터져나왔다. 할머니들이 대사를 까먹어 서로 알려주거나 “잘 들리지 않으니 크게 말해” “내가 말할 차례니까 잠깐만”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선 모두들 박장대소했다. 할머니들은 무대를 내려오면서 연신 “부끄럽다”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 마당에선 도라지회에 다니면서 젊은 재일동포들이 일본인들과 함께 “차별을 없애자”고 노력하는 걸 보고 “우리도 힘내야지”라고 다짐하는 할머니들의 심정이 소개됐다.
 “돌아가라니. 지금 돌아갈 곳은 이곳밖에 없어. 그런 말 말고 도라지회에 오면 어때. 맛난 거 함께 먹고 노래하고 춤추고 놀면 좋지 않나. 제대로 만나보면 그렇게 말하지 않게 되지 않을까.”
 이어 페루에서 온 일본계 2세 오시마 마사코(大城正子) 할머니의 글이 소개됐다. 할머니는 “(페루에서) ‘네 나라에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다”며 “‘조선에 돌아가’ ‘죽어’라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슬픈지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마당극을 닫는 노래도 역시 ‘고향의 봄’이었다.
 마당극이 끝난 뒤 할머니들이 모두 모여 사진을 함께 찍었다. “이 모습으로 모이는 게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진행자의 농담에 모두들 환하게 웃었다. 이날 할머니들에게 ‘고향’의 의미는 남달라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