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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람들

“95년 전 과거 일만은 아니야”...‘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연극무대에 올린 연출가 사카테 요지

 “지진이 있었다지만 평범한 마을에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런 참혹한 짓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없었던 게 되고, 그런 짓을 허용하는 게 됩니다. 피해자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그걸 허용해선 안됩니다. 아버지 세대가 했던 일을 숨기거나 끝내는 게 아니라 잘못됐다고 말해야 합니다.”
 지난 21일 도쿄 시모기타자와(下北澤)의 소극장 ‘더 스즈나리’에서 만난 일본의 극작가 겸 연출가인 사카테 요지(坂手洋二·56·사진)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선 반성하고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이날부터 ‘더 스즈나리’에선 1923년 일본 간토(關東)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다룬 연극 <9월, 도쿄의 길 위에서>가  무대에 올랐다. 논픽션 작가인 가토 나오키(加藤直樹)가 2014년 출간한 동명의 책을 원작으로, 사카테가 각본·연출을 맡았다.
 1923년 9월1일 도쿄를 비롯한 수도권 일대를 강타한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등의 유언비어가 나돌았고, 일본인 자경단, 경찰, 군인 등이 재일조선인들을 학살했다. 원작은 수도권 각지를 돌면서 당시의 학살 현장을 조명한 르포르타쥬다.
 “인물과 드라마가 없어 연극에 맞지 않는” 책을 선택한 건 지난해 9월1일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지사가 매년 도쿄 스미다(墨田)구 요코아미초(橫網町) 공원에서 열리는 간토대지진 조선인희생자 추도식에 현직 지사로는 처음 추도사를 보내지 않은 게 계기였다. 일본 극우들은 추도비에 새겨진 ‘희생자수 6000여명’이 근거가 희박하다면서 학살 사실 자체를 부인하려 하고 있다. 사카테는 가토 등과 함께 이런 움직임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고이케 지사는 지진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가 있으니 조선인만 따로 추모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했어요. 하지만 지진 때 죽은 사람과 자신들이 죽였던 사람을 같이 취급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겁니다. 독일이 과거의 전쟁과 학살을 반성하고 잊지 않으려는 데 일본은 이를 하지 않는 겁니다.”
 사카테는 원작을 다시 읽고, 책에 소개된 현장을 일일이 둘러봤다. 그는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지만,그 공간이나 넓이를 보면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이번 연극은 가토의 책을 ‘가이드북’ 삼아 현장을 찾는 일본인들을 등장시켜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식으로 구성됐다. 극 중에는 도쿄 지토세가라스야마(千歲烏山)의 한 신사의 13그루의 나무 얘기가 나온다. 조선인 희생자 13명을 추도하기 위해 심어졌다고 알려진 것들이다. 하지만 조사를 하다 보니 이 나무들이 당시 조선인을 살해한 뒤 재판을 받았던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심어진 거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사카테는 95년 전의 참극이 과거의 일만은 아니라, 현재와도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지난달 오사카 지진 때 편의점에서 도둑질하는 것은 외국인이라는 유언비어가 돌았던 것을 예로 들었다.
 “지독한 시대가 됐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이상하게 됐어요. 거짓 정보를 모두들 믿습니다. 간토대지진 때와 같아요. 당시에도 조선인이 급습해온다는 유언비어 때문에 조선인을 죽여도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런 상황을 대다수 일본인들은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는 것도 95년 전과 똑같다고 했다. 그는 “실제 (학살을) 하는 사람도 잘못이지만, 그걸 허용하는 사람도 잘못”이라면서 “지금 자위대가 군대가 되려 하고, 미국과 함께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되려는 데도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바라보고만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비판은 천황제에까지 이어졌다.전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천황제 보호에 급급했던 것이 현재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했다. 사카테는 “천황제는 잘못된 차별을 낳는 시스템”이라면서 “부락민(최하층 천민) 차별이나 외국인 차별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사카테는 일본 연극계를 이끄는 극작가·연출가로 주목받았다. 그의 희곡은 한국을 비롯, 세계 10여국에서 번역, 공연됐다.  
 1983년 극단 ‘린코군(燐光群)’을 창립, 사실을 다큐멘터리처럼 재현하는 버베이팀(Verbatim) 연극을 비롯해 사회 문제를 다루는 연극을 줄곧 선보여왔다. 이번 연극도 “우리가 해야만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선택했다.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연극을 따로 나누는 게  일본의 이상한 부분입니다. 정치적 이야기에는 모두들 몸을 뺍니다. 정치적인 것은 ‘위’에 맡기고, 우리 얘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정치는 자신의 문제로,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하는데 말이에요.”
 사카테는 이번 연극에서 ‘느낀다’는 점에 주안점을 뒀다고 했다. 그는 “극장 안에서 95년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모두들 느껴보자는 것”이라면서 “누가 무엇을 했던가를 제대로 보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연은 내달 5일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