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결혼을 앞두고 아버지가 원래 성이 김씨가 아니라 이씨라는 거예요. 그 전에도 아버지 나이가 실제보다 많아서 이상하게 여겼지만 그냥 넘어갔어요. 그런데 3년 전 이사할 때 아버지 짐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찍은 사진이 있는 걸 보고 깜작 놀랐어요. 아버지가 살아계실 동안 이 얘기를 써두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재일한국인 2세 후카자와 우시오(深澤潮·51)의 장편소설 <바다를 품고 달에 잠들다>는 이렇게 탄생했다. 22일 도쿄에서 만난 후카자와는 이 소설이 가족과 소원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숨겨졌던 ‘반평생’을 바탕으로 했다고 소개했다.
‘아버지가 죽었다’. 소설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무뚝뚝하고 꼬인 성격이라 친척이나 가족도 멀리했던 재일 1세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장례식에 관에 매달려 통곡하는 노인과 눈이 퉁퉁 불도록 우는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난다. 그리고 유품에서 발견된 낡은 공책에는 가족들도 몰랐던 아버지의 ‘또다른 얼굴’이 있었다. 아버지는 16살 때 일본으로 밀항해 이상주라는 이름 대신 문덕윤이라는 가짜 이름, 나아가 후미야마 도쿠노부(文山德允)라는 일본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민단(현재 재일본대한민국민단), 한청(재일한국청년동맹),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등에서 활동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지원했다.
“이번 소설은 사실과 사실 아닌 부분이 섞여 있어요. 하지만 아버지의 한청 활동 등은 들은 그대로 썼고, 당시 역사적 사건도 충실히 살렸습니다.”
경상남도 사천 출신인 후카자와의 아버지는 1948년 밀항을 위해 탔던 배가 쓰시마(對馬) 부근에서 침몰, 헤엄을 쳐서 구사일생으로 뭍에 도착한 뒤 도쿄까지 왔다. 아버지는 막노동과 파친코 등의 일을 하면서도 한청 등의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3년 전 발견한 자료 속에는 한민통 창립대회에 폭력배들이 난입하는 모습이 찍힌 필름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70년대 중반 ‘운동’을 그만둔다. 소설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고향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한 번이라도 뵙기 위해서였다. 소설 속에선 어머니가 만들어준 ‘복주머니’를 소중히 간직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수 차례 묘사된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 가려면 민단에서 여권을 받아야 했으니, 정부를 반대하는 운동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여기에 언니가 심장병에 걸린 것도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당시 재일동포들은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없어서 치료비가 많이 들었으니까요. 언니는 세상을 떠났지만요.”
후카자와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독재 정권에 아무 말도 못한 사람이 많다”면서 “그런 상황에서도 싸웠던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소설은 “남북 분단과 차별을 배경으로 국가와 민족에 농락당하는 사람들이 직조해내는 사랑의 현실을 그린 걸작”(저널리스트 사토 마사루)이라고 평가받는 등 호응을 얻고 있다. 한국쪽 출판에이전트를 통해 한국어판 출판도 타진받고 있다.
소설 속 딸 리에가 공책을 읽어가면서 아버지를 이해해가듯이 후카자와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소원했던 부녀 관계를 조금씩 회복하게 됐다고 한다. 이번 소설을 쓰는 것은 한 인간의 반대편에 풍부한 이야기가 잠들고 있다는 것을 아는 동시에 과거 부정했던 자신의 ‘루트(근원)’와 마주하는 것이기도 했다.
“어렸을 때는 한국인이라는 게 너무 싫었어요. 지금같은 헤이트스피치는 아니었지만, 한국인을 멸시하는 분위기였으니까요. 하지만 자신의 루트까지 부정하고 싶지 않아서 고민이 많았어요.”
후카자와에게 재일한국인으로서 정체성 문제는 주요 테마다. 2015년 펴낸 <소중한 아버지에게>도 주인공이 아버지가 재일한국인임을 뒤늦게 알게된 뒤의 갈등과 극복 과정을 그렸다. 후카자와는 “자신이 어떤 인물인지, 어디에 속하고, 어디에 뿌리가 있는지 항상 고민하고 그런 소설을 쓰고 만다”고 했다.
소설가가 된 것은 40대를 넘어서다. 2004년 이혼한 뒤 두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 느꼈던 고민과 고통을 ‘토해내듯’ 블로그에 쓴 게 주변의 공감을 얻었다. 이후 문장교실에서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배웠다. 2012년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R-18 문학상’에 재일한국인 사회의 중매쟁이 할머니를 그린 단편 <가나에 아줌마>가 당선됐고, 이듬해 단편집 <한사랑―사랑하는 사람들>로 본격 데뷔했다. 이후 ‘재일(在日)’은 무엇인지, 가족이란 무엇인지 작품을 통해 계속 추구해왔다.
뒤늦게 소설가의 길로 들어선 만큼 “지금 반드시 쓰고 싶고, 지금은 몰라줘도 나중에 이런 소설이 있었다고 평가해줄 소설을 쓰고 싶다”고 후쿠자와는 덧붙였다. 조선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전쟁과 성 착취, 결혼의 다양한 방식을 소재로 한 소설들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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