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3월20일 지하철 사린 테러 사건으로 일본 사회를 공포에 떨게 했던 ‘옴 진리교’ 교주 아사하라 쇼코(麻原彰晃·본명 마쓰모토 지즈오) 등 7명에 대한 사형이 지난 7일 오전 전격 집행됐다.
NHK 등 방송들은 당일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긴급 속보를 내보냈고, 주요 신문들도 호외를 발행하는 등 관련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일본 언론들은 이후에도 시리즈 기사나 전문가 인터뷰 등을 통해 옴 진리교 사건의 파장과 의미 등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23년 전 옴 진리교 사건이 일본 사회에 던진 파장이 그만큼 심대했다는 방증으로 보인다.
눈에 띄는 대목은 일본 언론들은 이번 사형 집행을 ‘헤이세이(平成) 시대’를 일단락짓는 행위로 풀이하고 있는 점이다. 헤이세이는 현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연호로, 1989년부터 사용되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은 내년 4월30일 퇴위하고, 아들 나루히토(德仁) 왕세자가 5월1일 새 일왕에 즉위할 예정이다. ‘헤이세이 최대의 흉악 사건’으로 불리는 옴 진리교 사건을 헤이세이 안에 마무리짓고 새 연호의 시대를 맞이하겠다는 판단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옴 진리교는 1989년 사카모토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 1994년 마쓰모토시 사린 사건, 1995년 지하철 사린 사건 등 극악한 사건들을 연쇄적으로 일으켰다. 이들 사건으로 29명이 사망, 60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특히 지하철 사린 테러 사건은 인파가 몰리는 출근시간대의 도쿄 도심에서 화학무기로 일반시민을 무차별적으로 노렸다는 점에서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를 경악케 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새해 벽두 발생해 6300여명이 숨진 한신(阪神) 대지진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다. 지하철 사린 테러 사건 며칠 뒤엔 경찰청장 저격 사건까지 벌어졌다. ‘치안대국’을 자부하던 일본이 받은 충격은 컸다. 옴 진리교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정부는 총리 관저에 24시간 체제의 위기관리센터를 설치하고, 위험단체를 규제하는 법을 제정하는 등 위기관리체제를 크게 전환하게 된다.
일본 사회가 옴 진리교 사건에서 헤이세이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읽는 이유는 더 있다. 1984년 요가 서클로 출발한 옴 진리교가 교세를 확장해 결국 테러집단으로 변질해 간 것은 앞선 연호인 쇼와(昭和·1926~1989년) 말기에서 헤이세이에 걸쳐서다. 이 시기는 일본의 경제와 사회 구조가 크게 바뀌었던 때다. 버블 경제와 그 붕괴, 급속한 국제화로 인해 지금까지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흔들렸다. 옴 진리교의 성장 배경에는 당시 ‘삶의 허무함’을 느끼던 젊은이들의 심리를 파고든 데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남는다. 왜 옴 진리교는 사회를 적대시해 사린 살포라는 극단으로 치달았는가. 왜 학력이 높았던 젊은이들이 교주의 지시 아래 무차별 살인으로 돌진했는가. 이들의 ‘폭주’를 막을 방법은 없었던 건가.
옴 진리교의 뒤를 잇는 단체들은 현재 신자 1600명, 35곳의 관련시설을 갖고 있다고 한다. 길거리나 대학, 인터넷에선 젊은이들을 노리는 ‘컬트집단’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고 일본 언론들은 지적하고 있다.
고립감이나 불만, 극단적 사상의 유포 등 젊은이들이 옴 진리교에 끌렸던 상황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가 이들이 기댈 장소를 마련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헤이트스피치(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차별·혐오 발언) 등 타자를 배제하고 소외감을 키우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건 아닐까.
사회학자 미야다이 신지(宮台眞司)는 “사회 전체가 ‘옴’적으로 되고 있는데도 그 자각도 학습도 없이 사형이 집행됐다. 일본 사회는 ‘옴’을 자신들의 문제로 포착하는 데 실패했다”고 했다. 일부 언론들이 “옴 진리교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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