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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김진우의 도쿄 리포트

외교의 아베, 납치의 아베

 조변석개(朝變夕改)도 이 정도면 ‘갑’이다. 보는 사람이 어안이 벙벙할 정도다. 최근 북한에 ‘러브콜’을 연발하고 있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얘기다.
 아베 총리는 지난 16일 “북한과 신뢰 관계를 증진해 가고 싶다”고 말했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큰 결단을 기대한다”며 “상호 불신의 껍데기를 깨고 전진하고 싶다”고 했다. 18일에도 “납치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내가 김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에게는 북·미 정상회담을 실현한 지도력이 있다”고도 했다. ‘대북 강경’ 일변도였던 그 아베 총리가 맞나 싶다. 그는 불과 2개월 전까지만 해도 “대화를 위한 대화는 의미가 없다” “최대한의 압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지난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태도를 180도 바꿨다. 아베 총리가 “도널드”라고 부르면서, “100% 일치”를 과시했던 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계기를 줬다. 문재인 대통령,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 이어 트럼프 대통령까지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 ‘유화’ 자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 ‘도널드’가 하는데 ‘신조’가 안 한다? 상상하기 어렵다.
 ‘절친’ 도널드와 이심전심인 만큼 향후 전개 과정을 알아챘을 수도 있다. 한 전문가는 “아베 총리까지 정상회담을 하려는 건 비핵화에 진전이 있다고 보는 거 아니겠냐”고 했다.
 아베 총리가 북·일 정상회담에 적극적인 이유는 더 있다. ‘재팬 패싱(배제)’ 우려를 씻고 현 국면에 올라타겠다는 셈법이다. ‘납치의 아베’로 지금 자리까지 오른 아베 총리로선 이번 기회를 놓치면 자칫 정치생명까지 위험하다고 직감했을 것이다. 각종 스캔들로 떨어진 지지율 부양과 오는 9월 자민당 총재 3연임에는 북·일 정상회담이 ‘믿는 구석’일 것이다. 실체 없는 ‘대북 교섭설’이 흘러나오고, ‘다음은 내 차례’ ‘나는 속지 않는다’ 같은 낯뜨거운 제목들이 친(親)아베 언론에 등장하는 게 우연일까.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해 북·일 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걸 말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찝찝함은 가시지 않는다.
 아베 정권에게 ‘북한 위협론’은 주요한 자산이었다. 지난해 10월 갑작스러운 중의원 해산의 명분도 북한 핵·미사일 위기로 인한 ‘국난’ 돌파였다. 그런 북한이 이번에 정반대에서 아베 정권의 ‘동아줄’이 된 건 아이러니하다. 북한의 ‘대화 공세’를 “미소 외교”, “시간 벌기”라고 비난하더니 지금은 “신뢰관계 증진” “상호 불신의 껍데기를 깨자”고 한다.
 일본이 북·일 정상회담의 목표로 삼고 있는 납치 문제도 마친가지다. 일본 정부는 그간 압력이 필수라는 자세로 일관해왔다. 스스로 선택지를 좁혀온 셈이다.
 더욱이 아베 총리가 북·일 국교 정상화의 기초로 삼자고 하는 2002년 북·일 평양선언은 ‘불행한 과거의 청산’과 ‘현안사항의 해결’을 병기하고 있다. 식민지 지배와 납치 문제의 동시 청산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선 후자만 강조됐고, 전자는 사실상 무시됐다는 지적이 없지 않다. 아베 총리가 과거 식민지 지배로 인한 피해와 고통에 대한 반성 위에 새로운 북·일 관계를 만들어갈 준비가 돼 있는지 의문이다.
 한 일본 언론인은 북·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일본 보수우익 세력들이 말 그대로 ‘멘붕(정신 붕괴)’이라고 했다. 지난 70년 간 한반도 분단 체제와 미국과의 군사동맹에 의존해온 이들에게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전면에 내세운 공동선언은 적잖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비단 아베 총리나 일본 보수우익세력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동북아시아가 새로운 평화체제로 가는 것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