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제/김진우의 도쿄 리포트

'평화'를 향한 여정은 어디서 시작됐을까

 지난달 28일 도쿄 와세다대 근처의 아바코 예배실을 찾았다. 그림책 <꽃할머니>의 일본어판 출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꽃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고(故) 심달연 할머니의 증언을 기초로, 열세 살 소녀가 겪어야 했던 모진 고초를 그리면서 전쟁과 폭력이 없는 세상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 한·중·일 3국이 기획한 ‘평화 그림책’ 시리즈 가운데 하나다. 한국과 중국에선 지난 2010년 출간됐지만, 일본에선 8년이 지나서야 빛을 보게 됐다.
 이날 행사에는 <꽃할머니> 작가 권윤덕씨와 함께 일본 그림책 작가 다시마 세이조(田島征三·78), 하마다 게이코(浜田桂子·71)씨가 나왔다. 두 사람은 ‘평화 그림책’ 탄생의 산고(産苦)를 지켜본 산 증인이기도 했다. 이들은 지난 10여년 간의 여정을 때로는 웃음을 섞어가면서 담담하게 술회했다.
 ‘평화 그림책’은 다시마씨를 비롯한 일본 그림책 작가 4명으로부터 시작됐다. 다시마씨는 “어떻게든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침략전쟁을 일으킨 일본에서부터 피해를 입힌 아시아의 작가들에게 호소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2005년 한국과 중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편지를 보내 취지를 설명했다. 2006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방문하기도 했다. 2007년 중국 난징(南京)에  한·중·일 작가들이 모였다. 언어는 달랐지만, 아이들이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같았다. “지난 날을 정직하게 기록하고, 오늘의 아픔을 나누며, 평화로운 내일로 함께 나가자”는 데 뜻을 모았다.
 이렇게 시작된 ‘평화 그림책’은 다시마씨의 <내 목소리가 들리나요>, 하마다씨의 <평화란 어떤 걸까>(이상 한국어판 제목) 등의 작품으로 결실을 맺었다. 다만 <꽃할머니>는 “심 할머니의 증언이 공문서와 일치하지 않는다” 등의 이유로 일본어판 발간이 취소됐다. 일본 우익들의 공격을 두려워한 때문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광’에 묻힐 뻔한 책을 살려낸 것도 다시마씨 등이었다. 기획을 처음 제안했다는 책임감이, 작고하기 전 만난 심 할머니와의 약속이 이들을 움직였다.
 두려움이나 망설임은 없었을까. 다시마씨는 “새삼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고 웃었다. 그는 우익의 선전차량들이 집 주변을 돌면서 스피커를 통해 “아이들을 적화(赤化)시킨다”고 비난하는 일을 겪었다. 하마다씨는 임신으로 부른 배를 안고 가두 선전을 하는 우익들에게 다가가 “그만 두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시마씨는 “80여년 전 미디어나 출판이 엉거주춤한 태도를 취한 게 일본이 점점 (태평양) 전쟁에 가까이 가도록 했다”고 지적했다.
 그래도 의문이 남았다. 갖은 곡절을 겪으면서도 ‘평화 그림책’을 밀어붙인 동력은 무엇일까. 실마리는 반평생을 그림책 작가로 활동하면서 반전·평화·생명의 메시지를 전해온 이들의 이력에 있어 보였다. 다시마씨의 얘기처럼 일본 작가들이 한·중 작가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던 것은 ‘가해국’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라는 양심과 실천의 고민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날 행사를 주최한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의 이케다 에리코(池田惠理子) 관장은 마무리말에서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을 열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일본 시민들이 제안을 했고, 각국에서 온 이들이 서로 얼싸안고 했다. 가해자부터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다시 느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한 여정은 멀다. 하지만 역사의 아픔에 공감하고, 상대방에게 손을 내밀어, 같은 방향으로 나가는 데서 미래가 바뀐다는 뜻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