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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김진우의 도쿄 리포트

아베 정권의 고름과 반창고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의혹, 새로운 증거가 튀어나오는 이상(異常) 사태다.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지난 한 달여 간이 그렇다. 오죽했으면 여당인 자민당 간사장의 입에서 “지긋지긋하다”는 말이 나올까. 
 상황이 이런 데도 발뺌과 책임 전가에 급급한 정권의 모습은 견제장치 없는 ‘아베 1강’의 본질을 새삼 생각케 한다. 아베 총리와 그 주변에서 내뱉는 무수한 언어들은 국민들을 ‘지긋지긋’하게 만들어 “정치가 다 그런 거지”라는 정치 허무·혐오에 빠뜨리려는 것 같다. 문제가 없다고 계속 강변하다 보면 어차피 국민들은 곧 잊는 법, 이라고 깔보는 걸까.
 아베 정권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건은 더 있다. 재무성 관료 ‘톱’인 후쿠다 준이치(福田淳一) 사무차관의 성희롱 의혹이다.
 잡지 <주간신초>는 지난 12일 후쿠다 차관이 회식 등의 자리에서 재무성 출입 여기자들에게 성희롱을 했다고 밝혔다. 보도에 따르면 후쿠다 차관은 “키스해도 되느냐” “호텔로 가자” 등 노골적인 발언을 반복했다. 심지어 모리토모학원 문제를 질문하는 여기자에게 “가슴 만져도 되느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주간신초>는 13일 성희롱 음성 녹음을 공개했다. 하지만 후쿠다 차관이 16일 의혹을 전면 부인하면서 사태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커졌다.
 문제는 이 사건을 대하는 아베 정권의 자세다.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겸 재무상은 “후쿠다 차관에게 긴장감을 갖고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줬다”고 밝혔다.후쿠다 차관의 간단한 보고만을 바탕으로 구두 주의를 주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려 한 것이다.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이 “긴장감을 갖고 행동하게 하겠다”고 밝힌 걸로 봐서 아베 총리가 이번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아베 정권은 ‘모든 여성이 활약하는 사회’를 주요 과제로 내걸고 있다.
 이런 자세는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마에카와 기헤이(前川喜平) 전 문부과학성 사무차관의 경우와 대비된다. 아베 정권은 마에카와 전 차관의 ‘데아이케(만남) 바’ 출입 보도에 호들갑을 떨었다. “교육행정의 최고 책임자로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는 등 인신공격까지 반복했다. 그래 놓고선 현역 사무차관의 성희롱 의혹에는 무르게 대응했다.
 하긴 스가 관방장관은 가케(加計)학원 수의학부 신설 특혜 의혹과 관련, 총리 비서관의 ‘총리 사항’ 발언이 적힌 에히메(愛媛)현 면담기록에 대해 “지방자치단체의 문서에 대해 정부가 코멘트하지 않는다”고 발을 뺐다. 정권에 불리한 일은 덮거나 피하고, 정권에 비판적인 측은 철저하게 때려 부순다.
 아베 총리는 잇따르는 불상사에 대해 “고름을 다 짜내겠다”고 했다. 하지만 고름이 멈출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 정권은 고름이 나오는 상처에 반창고를 붙여 눈에 띄지 않도록 하는 데만 열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태가 장기화되고 진위 여부가 흐릿해지면 국민들의 관심은 사그라들 것이라는 속내일지도 모른다. 실제 총리 관저에선 “2015년 안보법 통과 때도 야단법석이었지만 얼마 뒤 잠잠해졌다”는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아베 정권이 지금까지 몇 차례 위기를 극복해온 ‘자신감’도 한몫했을 지도 모른다. 분란을 싫어하고 안정을 지향하는 일본 국민들의 성향, 지리멸렬한 야당 상황 등도 거론된다.
 그렇다면 지난 14일 도쿄 국회의사당 앞을 가득 메운 3만 시민의 외침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이 거리로 나온 이유는 명명백백하다. 아베 정권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잇따라 나오는 증거들과 커지는 분노들. 반면 국민의 ‘지긋지긋한 감정’의 허점을 파고드는 정권. 진짜 승부는 이제부터일 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