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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일본 니혼 닛폰

“마음은 하나”... 재일 축구선수 안영학의 ‘마지막 패스’

 지난 5일 도쿄 기타(北)구의 도쿄조선중고급학교(조선고교)의 운동장에는 약 500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이 학교 졸업생으로 구성된 ‘안영학 올스타즈’와 축구부의 경기를 보기 위해서다. 이날 경기는 재일교포 3세로 일본과 한국의 프로축구팀, 그리고 북한 대표로 활약했던 안영학(38)을 위해 친구들이 기획한 ‘은퇴경기’였다.
 6일 도쿄신문에 따르면 안영학은 90분 간의 경기에서 현역시절과 마찬가지로 풍부한 운동량을 보이면서 경기를 주도해 팀의 4 대 0 압승을 이끌었다.
 안영학은 재일교포 프로축구 선수의 ‘문’을 계속해서 열어온 불굴의 선수로 평가된다. 그는 2002년 일본 프로축구 리그 (J리그) 시스템에서 상위 두번째인 J2 리그의 알비렉스 니가타에 입단해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방북 과정에서 북한이 일본인 납치를 인정해 북일 관계가 악화된 시기였다.
 하지만 안영학은 근성 넘치는 플레이를 선보이면서 팀의 J2 리그 우승과 JI 리그 승격에 공헌했다. 이후 나고야 그램퍼스를 거쳐 2006년에는 한국 프로축구 K 리그로 진출했다. 2009년까지 부산 아이파크와 수원 삼성에서 활약했다. 안영학은 그때 이미 북한 대표로 선출된 상태였다. ‘적성국가’인 한국에서 뛰는 경우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2010년에는 북한 대표로 남아프리카공화공 월드컵 예선에서 활약해 북한팀이 44년만에 본선에 진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10년부터 다시 J리그로 돌아간 안영학은 마지막으로 요코하마 FC에서 활동하다가 지난 3월 은퇴를 발표, 15년 간의 프로 생활을 마무리했다. 
 안영학이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모교인 도쿄조선고교의 축구부는 그가 3학년 때 전국선수권대회에 처음으로 출전하는 것을 인정받았지만, 대회 초반에 패했다.
 안영학은 “취직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주변의 친척들이 “축구를 계속 하고 싶어하잖나”라면서 그의 심경을 꿰뚫어봤다. 다시 프로선수가 되기로 결심한 안영학은 재수 생활을 거쳐 릿쇼(立正)대에 진학했다. 대학 재학시 아마추어 축구에서 박득의(43)를 만났다. 안영학은 그의 열정적인 지도가 없었으면 프로 선수가 될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프로 선수로 활동하면서 ‘국적’ 문제를 의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가 알비렉스 니가타에 입단했을 당시 북한의 화물여객선 만경봉호가 니가타항에 입항해 있었다. 떳떳하지 못한 기분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 서포터가 연습장에서 “납치 문제와 영학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니 힘내세요”라고 말해줬다. 그때 구원받은 기분이 들었다. 이후 안영학은 투지 넘치는  플레이와 겸허한 성품으로 서포터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알비렉스 니가타는 지난 4월 그의 은퇴식을 열어 주었다.
 5일 은퇴경기에도 니가타의 서포터가 20명 넘게 찾아왔다. 이들은 안영학을 응원하는 플래카드를 관중석에 내걸었다. 50대의 한 회사원은 “그는 팀을 위해 누구보다도 달린다. 1 대 1로는 절대 지지 않는다. 몇 번이나 넘어져도 바로 일어난다. 그런 플레이나 투혼에 우리들이 사로잡혔다”고 회상했다.
 이날 은퇴경기에서 안영학은 투혼을 담아 ‘다음 세대’로 연결되는 ‘마지막 패스’를 했다. 경기가 끝난 뒤 그는 유니폼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유니폼에는 ‘마음은 하나’라는 글씨가 써 있었다.  안영학은 “내 안에 국적은 단지 국적이다. 재일코리안으로 긍지를 가지고 더 잘 살아가고 싶다. 그것과 함께 많은 사람들과 서로 이해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는 은퇴 후 유소년 축구교실 지도자로 제 2의 인생을 걸어가고 있다. 축구교실의 신조는 “축구를 통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한다”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