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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김진우의 도쿄 리포트

‘갑A’로 불리는 피해자들

 갑(甲) A, 을(乙) B….
 2016년 7월 일본 사가미하라(相模原)시의 지적장애인 복지시설에서 입소자 19명이 살해되고 26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가미하라 장애인 살상 사건’.
 요코하마지방법원에서 지난 8일부터 시작된 공판에서 피해 장애인들의 ‘존재’는 ‘기호’로 표시됐다. 사망자는 ‘갑’, 부상자는 ‘을’로 분류돼 알파벳이 붙었다. 법원 측은 “유족들이 익명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족과 피해자 가족들은 또 다른 방청객과 피고에게 보이지 않도록 칸막이로 차단된 방청석에 앉았다. 아무 죄 없는 피해자 측이 편견과 차별을 우려해 이런 조치를 요구한 것이 일본 사회의 실상을 보여준다.
 사가미하라 사건은 일본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줬다. 피고 우에마쓰 사토시(植松聖·30)는 2016년 7월26일 새벽 자신이 일하다 해고됐던 복지시설에 침입해 잠들어 있던 장애인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잔인하게 살해했다. 범행 후 “중증장애인은 살아있어도 가망이 없다”고 했다.
 구류 중에도 언론 취재에 적극 응하면서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고 주장했다. “내가 하는 일은 이 사회를 위한 것”이라고 강변했고, “의사소통이 안되는 장애인은 불행밖에 낳지 않는다”고 했다.
 지난 8일 첫 공판에서 “모든 분들에게 깊이 사죄한다”고 말했지만, 그 직후 손가락을 물어뜯는 등 소란을 피웠다. 변호인 측은 심신미약을 이유로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왜 이런 참혹한 사건이 일어났는지 규명할 수 있을지 불투명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지난 15일과 16일 공판은 의미있는 자리였다. 피고의 일방적인 주장에 묻힌 피해 장애인들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검찰 측은 피해 장애인들에 대한 추억을 담은 유족들의 공술 조서를 읽었다.
 갑 B(사건 당시 40세·여)의 어머니는 “소파에 있으면 뒤에서 껴안곤 했다”면서 “딸의 웃는 얼굴을 봐달라. 피고가 빼앗은 생명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았으면 한다”고 했다. 갑 C(26세·여)의 어머니는 “개성을 갖고 열심히 살았다. 둘도 없는 딸이었다”라고 했다. 갑 H(65세·여)의 어머니는 “전차나 버스에서 아이나 노인이 있으면 자리를 양보하는 다정한 성격”이라고 전했다. 장애인은 불행의 근원이라고 했던 피고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진술이다.
 이번 재판에선 어머니의 요청으로 유일하게 실명이 공개된 ‘미호’(19세·여)의 이야기도 나왔다. 어머니는 미호가 아기 때 중증 지적장애를 동반하는 자폐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동반자살이 머리를 스친 적도 있지만 육아에 열중하면서 미호로부터 살아가는 희망을 얻었다”고 했다. 미호의 어머니는 “갑이나 을이 아니다. 미호라는 존재를 알았으면 했다”고 했다.
 일본 사회는 이번 재판 과정을 통해 장애인의 존재와 이들이 놓여있는 위치 등을 되짚어보고 있다. 장애인과 공생을 강조하면서도 장애인 복지시설 건설에는 반대 깃발이 세워지는 사회. 장애인이 ‘갑A’가 아닌 제대로 이름을 가진 ‘존재’로 인정받기 힘든 사회. 비단 일본 만의 얘기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