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히토(裕仁·1901~1989년) 일왕이 태평양전쟁 패전 후 7년이 지난 시점에 재군비와 개헌 필요성을 수 차례 언급한 사실이 당시 일본 정부 인사의 기록에서 확인됐다. 이 기록에는 또 히로히토 일왕이 1952년 5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축하행사 때 전쟁에 대한 반성의 뜻을 표명하려 했으나 내각의 반대로 무산된 내용도 담겼다.
NHK는 18일 초대 궁내청(왕실 담당 부처) 장관 다지마 미치지(田島道治)가 히로히토 일왕과의 대화를 기록한 ‘배알기(拜謁記)’의 내용을 공개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조인 후 5개월이 지난 1952년 2월 히로히토 일왕은 “헌법개정에 편승해 밖에서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해 부정적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부분은 다루지 않고 군비에 대해서만 공명정대하게 당당히 개정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같은 해 5월에는 “재군비에 의해 군벌이 다시 대두하는 것은 절대 싫지만, (소련의) 침략을 받을 위협이 있는 이상 방위적인 새로운 군비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히로히토 일왕은 같은 해 3월에는 “침략이 없는 세상이 된다면 무장이 필요하지 않겠지만 침략이 인간사회에 있는 이상 군대가 부득이하게 필요하다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일리가 있다”고 했다. 이에 다지마 장관은 “그 말씀대로지만, 헌법 앞에서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고, 최근 전쟁으로 일본이 침략자로 불리게 된 직후라 그것(재군비)은 피해야 하는 말”이라고 고언했다.
히로히토 일왕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최고 통수권자였지만, 1948년 태평양전쟁 일본 전범을 단죄한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전쟁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았다. 앞서 1946년 미국의 입김으로 제정된 새 헌법에는 1조에 일왕의 지위가 ‘상징천황’으로 규정됐고, 9조에는 ‘전쟁포기’와 ‘전력 보유불가’가 명시됐다. 소련의 위협 등을 이유로 들었지만, 전쟁 책임 추궁에서 벗어난 지 불과 4년 만에 재군비를 주장한 것이다.
한편 이번 기록에는 히로히토 일왕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를 기념해 1952년 5월 열린 ‘일본 독립 회복’ 축하 행사에서 전쟁에 대해 ‘후회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하려 했지만 요시다 시게루(吉田茂·1878∼1967) 당시 총리의 반대로 해당 언급이 빠졌다는 사실도 담겼다. 히로히토 일왕은 1952년 1월과 2월에 걸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기념 행사의 발언에 대해 “나는 아무래도 반성이라는 글자를 넣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군도, 정부도, 국민도 모두가 하극상이나 군부의 전횡을 놓친 것을 반성해 나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을 넣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언급했다.이에 대해 요시다 당시 총리는 “전쟁을 시작했다는 책임을 인정할 위험이 있다”, “이제 (일왕이) 전쟁이라든가, 패전이라든가 하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이에 따라 전쟁에 대한 회한을 담은 대목은 문장 전체가 빠졌다고 NHK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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