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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한일 관계

"징용 노동자, 손가락 절단 다반사...매달 1명꼴 감전사"

 “감전 등 사고사는 매달 1명 정도였다. 손가락 절단 사고도 많았다. 건물 뒤에 버려진 손가락은 새들의 모이가 됐다.”
 사이토 이사오(齊藤勇夫·90)가 전한 1944~1945년 ‘조선인 징용공’의 실태다. 그는 매월 두 차례 아사히신문의 삽지로 배달되는 <정년시대> 8월 첫주 호의 ‘전쟁의 기억’ 난에 조선인 징용공과 함께 한 경험담을 투고했다.
 사이토는 구제(舊制) 중학교 4년생이던 1944년 7월 학도근로령에 따라 오사카(大阪) 다나가와(多奈川)의 조선소에서 1년 간 일했다. 그는 “잔혹한 조선 현장에서 한반도로부터 동원된 수 백명의 징용공과 함께 해머를 쥐고 땀을 흘렸다”고 회고했다.
  “최악의 노동환경”이었다. 작업장은 대부분 옥외여서 비가 와도 그냥 맞고 일해야 했다. 작업복이나 구두 등을 지급해주지 않아서 개인 물품을 사용했다. 그는 “징용공의 경우는 닳아 떨어져도 가족 등이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며 “(옷을) 깁는 것도 뜻대로 안돼 철사로 깁든지 했다”고 전했다. 이어 “시멘트용 종이봉지에 구멍을 3개 뚫어 뒤집어써서 머리와 양팔만 내고 일하는 사람도 있었다”며 “신발은 바닥이 빠진 구두나 짚신이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위험했던 것은 발밑에 거미줄처럼 흩어져 있는 용접용 전선이었다. 그는 “절연고무가 벗겨진 전선을 밟아 감전 충격으로 쓰러져 뒷머리를 강타하는 사고가 많이 발생했다”면서 “비가 오는 날은 특히 충격이 강해서 정말 목숨을 걸어야 했다”고 했다. 중학교 동급생 가운데 2명이 감전 사고로 죽었다. 징용공도 매월 1명 정도씩 감전 등에 따른 사고로 죽었다. 그 자신도 수 차례 감전을 당해 지금도 다리가 저리다고 한다.
 사이토는 “작업용 장갑도 충분히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철판을 절단하는 커터로 손가락을 잃어버리는 징용공도 많았다”고 전했다. 그는 “집게손가락 첫번째 마디 부근에서 절단돼는 경우가 많았다”며 “손가락 4개를 동시에 잃는 사고도 목격했다”고 했다.
 “암흑의 동원근무”였지만, 소소한 즐거움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방공호에서 징용공에게 한국민요 ‘아리랑’을 배웠다. 아리랑을 부르는 사이 머리 위를 미군 폭격기 ‘B-29’가 날아갔다고 했다. 사이토는 “슬픈 역사의 진실을 직시해 기억에 남기고, 징용공들의 마음의 외침에 새삼 귀를 기울이고, 미충(微衷·변변치 못한 작은 뜻)으로 답하고 싶다”면서 글을 마쳤다.
 도쿄 인근 요코하마에 살고 있다는 사이토는 경향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글을 투고한 이유에 대해 “지금 일본 정부가 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징용공 문제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하면서 전부 해결됐다고 한다”면서 “죽을 때까지 실태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