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장막을 걷고 들어가, ‘태평양전쟁 책임자’인 히로히토(裕仁) 전 일왕의 사진을 콜라주한 회화 작품을 지나자, 오른쪽 저편에 ‘그 소녀’가 앉아 있다. 검정 치마와 흰 저고리, 단정히 두 손을 모은 단발머리 소녀. 그 옆의 빈 의자는 어서 와서 앉으라는 것 같다. 소녀 뒤로 비치는 할머니의 그림자. 그리고 “그 숭고한 정신과 역사를 잇고자 이 평화비를 세우다”라고 적힌 평화비.
“가슴이 온통 흔들려서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소녀상에 다가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1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 전시가 시작된 일본 나고야(名古屋)시 아이치예술문화센터 8층 전시실. 이름을 한사코 밝히길 꺼린 51세 여성(나고야 거주)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전시 시작 시간인 오전 10시를 조금 넘겨 온 이 여성은 소녀상 근처를 좀체 떠나지 못했다. 이쪽저쪽에서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고, 설명문도 끝까지 읽었다. 소녀상 전시 소식을 듣고 “혹시 문제가 생기면 보지 못할까” 싶어 서둘러 왔다.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소녀상의 이름이 일본에서 말하는 ‘위안부상’이 아니란 것도.
“방송을 통해 알고 생각해온 것과는 전혀 달라 놀랐어요. 정치 문제와 상관없이 사람에 대한, 여성에 대한 감정으로 대하고 싶습니다. 옆에 앉아보고도 싶은데 어떨까요.”
김운성·김서경 부부 작가가 제작한 소녀상은 이날 개막된 일본 최대 규모의 국제예술제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의 기획전 ‘표현의 부자유전·그 후’에 출품됐다. 소녀상이 평화비, 그림자 등과 함께 온전한 모습으로 일본 공공미술관에 전시된 건 처음이다.
일본군 위안부나 일왕, 평화헌법 9조 등 일본에서 금기시하는 내용을 다뤘다는 이유로 전시되지 못했던 작품 17점이 설치된 전시실을 찾은 관람객들의 발걸음은 한결같이 소녀상 앞에서 멈췄다. 소녀상이 전시된다는 걸 모르고 왔다가 실물을 처음 접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나고야에서 전철로 1시간쯤 떨어진 기후(岐阜)시에서 왔다는 단바라 미호(65)도 같은 경우다. 그는 “실물을 직접 보고 가슴이 아팠다”며 “소녀상이 평화로 나아가는 이미지로 널리 퍼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올봄 오키나와현립예술대를 졸업한 야마시타 가나코(23)는 친구의 두 살배기 아이를 안고 소녀상 옆에 앉았다. 그는 “소녀상 옆에 앉아보니까 나와 같은 크기의 소녀, 가까운 존재로 느껴졌다”면서 “소녀상은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주최 측은 이번 전시의 민감성을 의식하고 있다. 소녀상을 비롯한 전시물 사진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SNS상에 사진이 확산될 경우 우익들의 공격을 받을까 우려한 때문이다. 전시실 앞에도 이런 요청문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참가 작가들은 작품 옆에 SNS에 올려도 된다는 내용의 종이를 붙이는 식으로 항의의 뜻을 표시했다.
전시를 준비한 측도 ‘기대 반 불안 반’의 심정이다. 이날 오전 주최 측, 변호사 등과 함께 경비 문제를 논의했다. 전날 소녀상 전시 소식이 알려진 뒤 주최 측에 항의 전화가 150통 가까이 왔다. 이날도 우익으로 보이는 이들이 상황을 살피기 위해 전시장을 찼았다고 한다. 전시를 준비한 측은 “이번 주말이 고비”라고 했다. 전시 준비에 참여한 출판편집자 오카모토 유카는 “이번 예술제에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기 때문에 이들의 응원이 널리 퍼질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서경 작가는 “긍정적인 반응도 있지만, 불안해하는 반응도 있는 걸 안다”면서도 전날 있었던 사전공개행사 얘기를 들려줬다. 작가 엄마를 따라온 10세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소녀상 옆 의자에 앉아 줄곧 소녀상을 응시했다. 그 아이는 소녀상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작은 새를 보면서 “소녀가 외로울까봐 앉았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 작가는 “소녀상을 만들 때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그 말을 듣고 너무 감동적이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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