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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뉴스 깊이보기

폭행사건 휘말린 스모계, 인기 회복세 찬물

   일본의 국기(國技)로,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스모(相撲·일본 씨름)가 위기에 직면했다. ‘천하장사’격인 요코즈나(橫網·최상위 계급 선수)의 폭행 사건이 발각되면서다. 여기에 사건 관련자들의 진술이 엇갈리고, 피해자 측과 일본스모협회의 대응도 혼란상을 보이면서 일본 국민들의 시선은 더욱 차가워지고 있다. 
 스모는 올해 17년 만에 ‘요코즈나 4인 시대’를 맞고, 정규대회에 연일 만원사례가 이어지면서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요코즈나의 폭행 사건에다, 폭행 가해자를 포함한 요코즈나 3명이 대회 출전을 포기하면서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요코즈나의 후배 폭행으로 일본 열도 ‘발칵’ 
 사건은 지난달 25일 밤 돗토리(鳥取)현 돗도리시에서 열린 몽골 출신 스모 선수들의 술자리에서 발생했다. 이 자리에는 몽골 출신 요코즈나인 하루마후지(日馬富士·33), 하쿠호(白鵬·32), 가쿠류(鶴龍·32)를 비롯, 일본인 선수와 일본스모협회 관계자  등 10명 안팎이 참석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이들은 장코(스모 선수들이 즐겨 먹는 냄비 요리) 음식점에서 술을 곁들여 기분 좋게 1차를 한 뒤 호텔 라운지로 장소를 옮겨 2차를 했다. 여기서 ‘사단’이 났다. 하루마후지가 몽골 출신 후배 다카노이와(貴ノ岩·27)에게 “선배들에게 제대로 인사하지 않는다” 등 평소 태도에 주의를 주는 사이 다카노이와의 휴대폰이 울렸다. 다카노이와가 휴대폰을 꺼내는 순간 하루마후지가 탁자 위에 있던 맥주병을 집어들어 머리를 가격했다고 한다. 하루마후지는 다카노이와에게 올라타 20~30차례 주먹다짐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카노이와의 스승인 다카노하나(貴乃花)가 지난달 29일 돗토리현 경찰에 하루마후지를 폭행 혐의로 신고, 경찰이 조사에 들어갔다. 지난 5~9일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던 다카노이와는 13일 앞머리 열상(裂傷), 두개골 골절 등으로 인한 전치 2주 진단서를 일본스모협회에 냈다. 
 이 같은 사실이 지난 14일 한 스포츠신문의 보도로 알려지면서 일본 열도는 발칵 뒤집혔다. 하루마후지는 보도 당일 “깊이 사죄드린다”고 머리를 조아린 뒤 12일부터 진행되던 규슈(九州)대회 출전을 포기했다. 경찰이 하루마후지를 소환하는 등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가운데 스모협회도 하루마후지와 술자리 참석 선수들을 상대로 자체 진상조사를 벌이고 있다. 

■‘맥주병 구타’의 진상은…피해자 측은 협회 조사 거부 
 그런데 사건 발생 한 달이 지났는데도 혼란이 더욱 깊어지는 양상이다. ‘맥주병 구타’는 없었다는 주장이 나오는 데다 피해자인 다카노이와 측도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하쿠호는 지난 16일 “(하루마후지는) 맥주병으로 때리지 않았다. 보도에 어긋나는 게 있다”고 말했다. 하쿠호는 하루마후지가 폭행 다음날 다카노이와에게 사과했고, 그 다음날에는 서로 악수도 했다고 전했다. 일부 언론에선 하루마후지가 리모컨으로 다케노이와를 때렸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사건이 알려진 후 일체 입을 열지 않고 있는 다카노이와 측의 대응도 의구심을 낳고 있다. 다카노이와는 전치 2주의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지난달 29일까지 경기에 나왔다. 지난 2일 후쿠오카 시장을 방문한 자리에선 “10승 이상 달성”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다카노이와의 스승인 다카노하나도 경찰에 신고하면서도 스모협회에는 보고하지 않았다. 경찰로부터 연락을 받은 협회가 지난 3일 사정을 물어보자 “자세한 것은 모른다”고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혼란의 배경에는 다카노하나와 스모협회 집행부 간 갈등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다카노하나는 현역 시절인 1990년대 형인 와카노하나(若乃花)와 함께 ‘와카다카 열풍’을 이끌면서 큰 인기를 모았다. 은퇴 후에는 스모협회 집행부와 거리를 두면서 스모계의 개혁을 외쳤다. 2016년 스모협회 이사장 선거에 출마해 현 핫카이(八角) 이사장에 패했다. 그는 지난 22일 핫카이 이사장의 진상 파악 협조 요청에 대해서도 “거절하겠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근절되지 않는 폭행 …계급적인 스모계 문화 여전 
 스모는 일본인 스스로 국기(國技)라 부를 만큼 사랑받는 전통 스포츠이고, 세계에서도 독특한 일본 문화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요코즈나는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쏠리는 사실상 공인(公人)으로 여겨진다. 요코즈나는 품격과 역량 양면에서 뛰어난 선수를 자격 조건으로 한다. 그런 요코즈나가 폭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일본 사회가 받은 충격은 크다.
 이번 사건은 또한 스모계가 폭력과 부정의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2007년 6월 당시 17세 스모 선수가 스승과 선배로부터 폭행을 당해 사망했다. 2010년에는 요코즈나 아사쇼류(朝靑龍)가 술에 취해 지인을 때린 책임을 지고 은퇴했다. 2011년에는 스모 선수 등 60여 명이 연루된 야구 도박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스모계의 승부 조작이 발각됐다.
 스모협회는 이 같은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개혁작업을 진행해왔다. 선수 폭행 사망 사건 이후 외부인사를 포함하는 재발방지위원회를 설치하고 연습실에서 죽도를 없애는 등 폭력 추방에 노력해왔다. 승부 조작 사건 이후에는 외부 인사를 위기관리위원장과 감사에 임명했고, 경찰·의료 관계자를 초청한 강연을 여는 등 계몽 활동을 해왔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드러났듯 폐쇄적이고 계급적인 스모계 문화를 바꾸려는 실제적인 노력은 거의 없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스모 인기 회복세에 ‘먹구름’ 
 일본 스모계는 올들어 ‘경사’가 잇따르면서 그야말로 후끈 달아오른 상태였다. 지난 1월 기세노사토(稀勢の里)는 일본인 선수로는 19년 만에 요코즈나로 승진한 데 이어 그 직후 열린 대회에서 부상 투혼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하쿠호는 역대 최다승(1048승) 기록을 새로 쓰고 있다. 이에 힘입어 1996년 이후 21년 만에 연간 총 90일의 정규대회가 만원사례를 이뤘다.
 스모계로선 꾸준한 노력 끝에 맞은 호황이다. 1990년대 ‘와카다카 열풍’에 힘입어 공전의 인기를 얻었던 스모는 2003년 다카노하나의 은퇴를 계기로 인기가 시들해졌다.  2005년에는 연간 정규대회가 전성기의 6분의 1인 15일까지 떨어졌고, 2011년 승부 조작 사건이 터지면서 정규대회가 취소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조직 개혁과 꾸준한 홍보 활동을 통해 인기를 서서히 회복했다.  선수들이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팬들과 교류하는 등  먼 존재였던 스모 선수를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노력들이 빛을 본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제 2의 호황을 맞고 있는 스모계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평가다.
 올해 마지막 정규대회인 규슈대회가 26일 끝났다. 들썩였던 초반에 비해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았다. 몽골 언론들은 자국 출신 선수들이 연루된 폭행 사건을 보도하면서 “규슈대회가 우승 경쟁보다 폭행 문제가 화제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경찰은 연내 하루마후지를 불구속 입건할 방침이라고 일본 언론은 전했다. 하루마후지는 스모계를 떠나야 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또다른 요코즈나인 가쿠류는 규슈대회 시작 전에 부상을 이유로 대회 출전을 포기했고, 기세노사토도 부상 때문에 대회 도중 하차했다. 요코즈나 가운데 유일하게 대회를 마친 하쿠호는 조만간 경찰과 스모협회의 조사에 응해야 한다. 기세노사토의 승진으로 17년 만에 맞은 ‘요코즈나 4인 시대’의 흥분은 얼마 가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