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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이 사토시, <국체론>

<영속패전론>으로 알게 된 일본의 젊은 학자 시라이 사토시의 책. 시라이는 <영속패전론>에서 전후 일본은 미국에 종속적인 정치체제 탓에 패전 사실을 의식 속에서 밀어내버리고 전쟁책임을 부정했다고 말한다. 이로써 패전을 극복할 기회를 박탈하고, 영속적인 패전으로 가게 됐다고 봤다. 이번 책에서도 이런 논리를 전전 천황, 전후 미국이라는 두 주체·체제의 유사성을 비교하면서 흥미롭게 펼쳐냈다. 다음은 일부 발췌.

-이런 상태의 도착점은 어떤 의미에서 ‘파산’이다. 아니, 원전 사고 재난 지역은 이미 ‘파산’을 경험했고, 장기 집권 중인 아베 정권의 상궤를 벗어난 국회 경시와 거짓 답변, 삼권분립 파괴 등으로 의회제 민주주의 또한 ‘파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지배층의 도의적 파산에 호응하는 형태로 나타난 각종 차별의 공공연한 표출은 대중 차원의 정신적 파산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또 지배층과 대중을 이어주는 위치에 있는 매스미디어(언론)도 퇴각에 퇴각을 거듭해왔다. 요컨대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파산’하고 있는 것이다. 전후 민주주의 위기는 단지 평화헌법 존속이 곤란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후 사회의 총체적인 열화를 의미한다.

-전후의 일본인들에게 경제성장은 국가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었기에 영원히 지속시켜야만 했다. 따라서 성장의 정지는 순수하게 경제적인 곤란뿐만 아니라 정체성의 위기를 초래했으며, 그 때문에 오히려 불가능한 신화에 대한 집착이 생겨났다. 경제 침체 이유 중 하나인 급격한 인구 감소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대책을 취하지 못한 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로 인한 재난에서 다시 일어선다는 부흥의 상징을 도쿄에서 열릴 올림픽 게임이나 오사카에서 유치하는 만국박람회에서 구하는 사태가 그 뒤집힌 의식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미국 내지 맥아더는 천황의 전쟁 책임 추궁보다 더 원리적인 ‘국체의 적’으로부터 천황을 지켜주었다. 그 적은 공산주의였다. 동서 대립이 격화하는 가운데 그 적은 일본의 천황제뿐 아니라 미국 자신에게도 절대적으로 극복해야만 할 존재였다. 동서 대립의 격화가 야기한 점령 정책의 전환, 즉 ‘역코스’의 흐름 속에서 전전 및 전쟁 도중까지만 해도 미국을 귀축(鬼畜)이라 부르라고 부추겼던 보수 지배층(특히 파쇼화를 추진한 사람들)은 바로 그 귀축의 환심을 얻음으로써 자신들의 복권 기회를 잡았고, ‘대미 협력=반공주의=국체 보위’라는 삼위일체는 이런 변절을 정당화하는 논리를제공함으로써 주권의 자발적 포기를 촉진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포츠담선언 수락에서 점령,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미일 안보조약을 통해서 주권을 포기하는 대가가 바로 국체호지였던 셈이다.

-대소련 전략에 더해 ‘중국 봉쇄 정책’이라는 대방침이 있었기에 전후 일본에 미국은 정치와 경제 양 방면에서 적극적으로 관대한 보호막을 펼쳤다. 조반니 아리기는 말한다.
 “1960년에는 미국은 이 나라들(일본과 그 옛 식민지)을 일본 중심의 지역적 무역 네크워크로 상호 통합하는 작업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한국과 대만이 일본의 식민지주의라는 과거의 불행을 넘어서서 일본의 무역과 투자에 문호를 개방하도록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그렇게 해서 일본은 미국의 패권 아래 경제적 배후지를 아무런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획득했다. (일본이 확보한) 그 배후지는 20세기 전반기에 일본이 영토의 확대를 통해 획득하려 했고, 이를 위해 그토록 열심히 싸웠지만, 최종적으로 2차 세계대전에서 참패해 잃어버린 것이었다.”

-여론조사에서 아베 정권 지지자들의 최대 지지 이유는 “달리 적임자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정말 맞는 말이다. 현재의 표준적인 일본인은 콤플렉스와 인종주의에 절은 ‘가축인(家畜人) 야푸(‘노예로 봉사하는 마조히스트’라는 뜻의 일본식 조어)’ 누마 쇼조라는 전후 일본인의 아이덴티티를 더는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예감하면서도, 그것을 대신할 아이덴티티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거울에 비친 비참한 자신의 모습인 아베 정권에게 소극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이다. 이 수렁과 같은 무기력에서 벗어나는 일에 비하면 아베 정권이 계속될지 말지 여부는 사소한 문제다.

-“지금 만일 아시아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미국이 팍스 아메리카나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의 힘을 필요로 할 경우, 일본은 동원에 응해 대활약을 펼칠 것이다. 일본 경제는 전후-전전에도 어느 정도는 그랬지만- 내내 전쟁과 더불어 번성한 것이다. 몰락하고 있을 경우에는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무작정 전쟁에 협력할 것이다.”
<왜 일본은 몰락하는가>에서 모리시마가 예언한 것 중 이토록 섬뜩하고 날카로운 것이 없다. 그 이유는, 이 같은 인식을 가지고 아베 정권의 미일 안보 체제 강화 협력과 2017년부터 2018년까지의 한반도 위기 고조에 대한 처신을 해석해보면 그 모든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북한에 더욱 압력을’ 가하라고 주장한 이 정권은 요컨대 한반도 유사 사태가 발생하기를 기대했던 것이고, 그렇게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일 안보 체제를 더욱 강화, 즉 미일 전략을 글자 그대로 일체화하려면 미일의 안전보장정책의 전반적 방향성(=평화주의)를 일치시켜야만 한다. 따라서 ‘적극적 평화주의’의 채용은 앞서 살펴본 ‘미국류의 평화주의’ 사고방식에 일본의 안전보장정책 사고방식을 합친 것, 바꿔 말하면 ‘전쟁을 하지 않음으로써 확보하는 안전’에서 ‘전쟁을 함으로써 확보하는 안전’으로180도 방침 전환-물론 이 전환이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을 함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