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야산(高野山)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20년 전이다. 
한창 일본 만화에 빠져 있을 때였다. 
당시 유명했던 만화 중에 <공작왕>이라는 게 있었다. 
밀교의 비법을 전수받은 인물이 암흑의 무리들과 싸우는 내용이었다. 
잔인한 장면과 함께, 속속 등장하는 기괴한 사건들과 인물들, 선과 악이 뒤섞인 세계관 등이 기억에 남는 만화다. 
이 만화에서 일본 밀교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게 고야산으로, 만화에선 이곳에서 온 승려들이 마계 무리들과 맞선다.   
해서 고야산 하면 웬지 신비스러운 종교 성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같은 생각은 시바 료타로 원작의 <가도를 가다> 다큐멘터리에서 고야산에서 정진수행하는 승려들의 모습을 보고 더욱 굳어졌던 것 같다. 

2. 
실제로 고야산은 9세기 중국 밀교를 배우고 돌아온 홍법대사 구카이(空海)가 개창한 진언종이 태동한 곳으로, 진언종의 총본산인 곤고부지(寺) 등 불교 사원들이 몰려 있는 곳이다. 

고야산은 8개의 봉우리에 둘러싸인 연꽃 모양의 분지 모양인데, 당시 수도였던 교토와는 떨어진 곳에 근본도장을 열고자 했던 구카이의 청을 사가 천황이 받아들임으로써 이 일대가 불교 성지로 자리잡게 된다. 
고야산은 주홍색의 거대한 탑(곤폰다이토)으로 유명한 단상 가람(壇上伽藍)을 중심으로 117개의 사원과 상점들이 하나의 종교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고야산은 2004년 인근의 요시노, 구마노와 함께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3. 
고야산 가는 길은 산지에 자리한 일본의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열차를 타고 가다 케이블이나 로프웨이로 갈아 탄 뒤 버스 등을 다시 타는 순서를 따르게 된다. 
고야산은 오사카 남쪽의 와카야마현 북동부에 자리잡고 있는데, 오사카 중심지 남바에서 난카이고야선 특급이나 급행을 타면 된다.
(간사이 국제공항이나 와카야마시로 가는 난카이 본선을 타면 곤란한데 나도 역무원이 안 가르쳐줬으면 그렇게 할 뻔했다) 
지정 좌석인 특급의 경우 돈을 더 내고 특급권을 따로 구입해야 한다.   
남바를 출발한 열차는 오사카 남서부의 사카이(堺)시 등을 지나면서 한적한 시골 마을을 달리게 된다. 
차창 밖으로는 가지런히 모내기가 끝난 논들이 펼쳐지기도 한다.   
급행의 경우 하시모토(橋本)역에서 4량짜리 열차로 갈아타게 된다.
여기서부터 열차는 그리 속도를 내지 못하는데 지나가는 역마다 일일이 정차하는 탓도 있지만 산간 지역으로 들어가면서 철로 자체가 구불구불 이어지기 때문이다. 
차창 밖으로도 삼나무로 가득한 산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열차는 점점 고도를 높여가면서 산기슭을 구불구불 올라간다.   
열차가 지나는 역들은 대부분 역장이 한 명밖에 없을 것 같아보이는 낡은 목조 건물이다. 
열차가 종점이자 이름부터 불교적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고쿠라바시(極樂橋)역에 도착하면 바로 옆에 있는 케이블카를 타게 된다. 
이 케이블카는 80년전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경사가 꽤 급하다. 
케이블카를 타고 5분 정도면 해발 800미터가 넘는 고야산역에 도착. 
남바에서 계산하면 1시간30분 정도가 걸린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10분 정도 더 가야 주요 사원들이 모여 있는 마을 중심지로 들어서게 된다. 


4.
버스를 타고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고야산 일대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오쿠노인(奥の院). 

홍법대사 구카이의 묘가 있는 곳으로 구카이 신앙의 중심지다. 
구카이의 사당인 도로도(堂)까지 약 2㎞ 정도 이어지는 참배길에는 수백년은 넘은 것처럼 보이는 삼나무가 둘러서 있는 가운데 수많은 묘비들과 공양탑, 오륜탑, 석불상 등이 늘어서있다.
묘비는 황족이나 귀족, 장군에서부터 상인, 서민까지 약 20만개가 있다고 한다. 
역사적인 인물들이나 사건과 관련된 묘비에는 오디오가이드 표시를 해놓아서 일본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흥미를 느낄 만하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다케다 신겐 등 일본 전국시대의 인물들은 물론이고, 가부키로 유명한 <쥬신구라>의 실제 모델이 된 47사무라이의 묘비, 유명한 하이쿠 시인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비석 등을 찾아볼 수 있다. 
또 정확한 배경은 모르겠지만 임진왜란 때 전사한 조일 양국 군사들을 위한 위령비, 태평양 전쟁 때 보르네오 전투에서 사망한 군인들을 위한 위령비 등도 있다. 
참배길 입구에는 구카이의 석상과 함께 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가 고야산에 대해 쓴 문학비가 눈에 들어온다. 



참배길에 있는 가장 큰 건축물은 스겐인(崇源院) 부인의 공양탑이다.
스겐인 부인은 지금 한창 NHK에서 방영중인 대하드라마 <고우-공주들의 전국>에서 우에노 주리가 연기 중인 고우(江)로, 오다 노부나가의 조카이자, 나중에 도카가와 막부의 2대 쇼군 히데타다의 정실 부인이 된 인물이다. 
이 공양탑은 3남인 타다나가가 어머니를 기리며 세웠다. 
바로 옆에는 히데타다와 고우의 딸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에게 시집가 나중에 남편을 잃어야 했던 비운의 주인공 센히메(千姫)의 위령탑도 있다.




참배길 끝에 있는 다리를 건너면 구카이의 사당인 도로도로 올라가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사진 촬영 금지) 
도로도의 천장에는 수많은 등이 달려 있는데 효녀 데루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아 봉헌한 <빈녀의 등>, 시라카와 상황이 봉헌한 <시라카와 등>이 지금도 불을 밝히고 있다고 한다. 
도로도 뒤쪽에는 납골당과 함께 구카이의 묘소인 고뵤가 있는데 많은 일본인들이 이곳 앞에 분향하고 손을 모아 기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난 뒤 오쿠노인의 또 다른 입구까지 가는 길을 따라 내려간다.  
무연고자들 위한 묘비들을 모아 놓은 곳이 눈에 띈다.   
조금 더 내려가니 수많은 묘비들이 늘어서 있는 공원 묘지가 있다. 
참배길에서도 봤지만 파나소닉이나 야쿠르트 같은 일본의 유명기업 창업자들의 묘비 등이 있고, 닛산자동차의 사망종업원 위령비 같은 위령비들도 있다.  
왼쪽 영령전 뒤로 보이는 하늘이 30도를 웃도는 더위에 어울리지 않게 새파랗다.
공원 묘지 맨 끝에는 로케트 모양의 위령비가 있는데 위령비를 세운 회사가 항공회사인지...




5.
다시 버스를 타고 음식점과 기념품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고야산 중심지 센주인바시(千手院橋)에서 내렸다. 
종교마을답게 거리 중간중간에는 절들이 있었는데 대문을 열어놓아서 누구든 엿볼  수 있게 해놓은 곳이 많았다.
거리에는 염주 등 불교 관련 기념품을 파는 가게도 있고, 일본 전통 떡이나 과자를 파는 가게도 있어 웬지 수덕사나 법주사 앞 마을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실린 100년이 넘었다는 약국 <토라야>도 있었다.
 


6.
센주인바시에서 5분 정도만 걸어가면 커다란 주차장이 보이는 오른쪽에 고야산 진언종의 총본산 곤고부지로 들어가는 돌계단이 나온다. 
본당으로 들어가면 여러 칸의 방들이 나오는데 각 방들의 창호에는 아름다운 그림(후스마에)들이 그려져 있다. 
눈 덮인 나무와 백로가 그려져 있는 야나기노마(間)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양자 히데쓰구가 할복 자살한 곳으로 유명하다.  
본당에서 기다랗게 경사진 통로를 지나 가면 별전이 나오는데 이곳에도 벚꽃이나 수련, 연꽃 등 4계절을 나타내는 꽃이나 새를 그린 호화로운 그림들이 그려진 방들이 있다.  
그 뒤쪽에 있는 정원인 반류정(庭)은 일본 최대의 석정으로 유명하다. 
바로 옆 신별전에선 무료로-물론 입장료 500엔에 포함돼 있겠지만- 녹차 한 잔과 센베이를 나눠주고 스님이 강의를 들려준다. 
본당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있는 부엌도 인상적인데 커다란 우물과 함께 솥들이 걸려 있다.

 

7. 
곤고부지를 나와 조금만 더 위로 올라가면 고야산의 상징인 곤폰다이토(根本大塔)가 있는 단상가람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길을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거대한 곤폰다이토가 시야에 들어오고 바로 앞에는 동탑이 보인다. 
동탑과 곤폰다이토 사이에도 몇 채의 건물이 있다. 
곤폰다이토로 올라가기 전 바로 왼쪽에는 목재의 질감과 색감이 그대로 살아있는 후도도(不動堂)가 나온다. 
국보이기도 한 후도도는 가마쿠라 시대인 1198년에 건립된 건물로, 고야산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한다. 

 



단상가람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곤폰다이토는 청색의 지붕과 주홍색 본체가 어울러진 가운데 압도적-48.5미터라고 한다-인 위용을 자랑한다. 
고야산 관광 안내책자의 단골이다. 
탑 안쪽에는 대일여래 불상이 배치돼 있는데 기둥들에도 극채색의 부처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곤폰다이토의 극채색에 가려져 있지만 절 전체의 본당인 곤도(金堂)나 구카이 대사를 기리는 불당인 미에도(御影堂), 서탑 등도 볼 만하다.  
곤도 옆쪽으로는 일본 사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도리이와 함께 신사도 있다.  



8. 
곤폰다이토 뒤쪽의 차도에 늘어선 절들 사이로 난 오솔길을 넘어가면 다시 차도가 보이면서 도쿠가와가의 영묘가 나온다.  
하지만 도착했을 때에는 개관 시간이 이미 지나 문이 닫혀 있었다.  
고야산의 입구라고 할 만한 다이몬(大門)을 찾아가기에도 교통편이나 시간이 맞지 않고, 각종 국보와 보물들을 소장하고 있는 레이호칸(霊宝館)도 패스. 
오는 길과 반대로 버스-케이블-열차-열차를 타고 오사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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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ontif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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