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파오에서의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아침을 느긋하게 먹고, '스나오군'을 타고 미야노우라항쪽으로 갔다.
아이가 좋아하는 자전거를 빌려타고 섬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설마 했는데, 대여점에는 아이용 자전거가 없었다.
아쉬워하는 아이를 달래, '스나오군'을 다시 타고 혼무라 지구로 향했다.
<이에 프로젝트>를 둘러보면서 마을도 천천히 구경하기로 했다.
<이에 프로젝트>는 혼무라 곳곳의 일반주택, 치과병원, 신사 등 빈 집이나 폐가를 개조, 수리해 설치미술 작품으로 탄생시킨 프로젝트다.
사람의 시간과 기억이 남아 있는 공간 그 자체를 작품화한 것이다.
지추미술관이나 베네세 하우스가 자연과 예술의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에 프로젝트>는 인간과 그 삶의 역사에 초점을 맞춘 셈이다.
1988년 가도야(角屋)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가도야 외에 미나미데라(南寺), 고오신사(護王神社), 이시바시(石橋), 고카이쇼(碁会所), 하이샤(はいしゃ), 긴자(きんざ-사전예약제) 등 7채가 진행되고 있다. .
<이에 프로젝트>의 건물들은 하이샤를 빼면 깔끔하게 개수된 일본식 집이다.
그런데 내부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2-1.
농협 앞 담배가게에서 긴자를 뺀 6채를 둘러볼 수 있는 티켓을 샀다.
가장 가까운 카도야로 향하는 길, 왠일인지 얼룩 고양이가 야옹야옹거리면서 자꾸만 따라온다.
그러고 보니 나오시마에는 고양이가 많다고 했다.
가도야는 가도(角, 모퉁이)라는 말 그대로 길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다.
200년 정도된 낡은 집을 칠을 새로 하고 원래 모습으로 복원해 미야지마 다츠오(宮島達男)의 작품 3점을 설치했다.
어두컴컴한 방으로 들어가니 방 한가운데가 물이다. 물 안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디지털 숫자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Sea of Time '98>이라는 작품이다.
카도야 옆 비탈길을 올라가면 평평한 언덕 위에 고오신사가 나온다.
신사의 경내는 하얀 자갈이 깔려있고, 그 뒤로 자그마한 본전이 덩그러니 서 있다.
본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유리로 돼 있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빗질을 하고 있던 안내원이 회중전등을 주면서 옆으로 내려가 보라고 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통로로 이어진 어두운 석실이 있었다.
아이는 자기가 앞장 서서 동굴 탐험을 하겠다며 회중전등을 들었다.
석실 안으로 들어가니 컴컴한 어둠 속에 뭔가 있다.
불을 비춰보니 유리 계단이다.
지하의 계단이 지상의 계단과 연결돼 본전으로 이어지게 돼 있는 것이다.
고오신사 반대쪽 길로 가면 바로 나오시마 하치만신사가 나오고 돌계단이 깔린 비탈길을 더 내려가면 고쿠라쿠지라는 절이 나온다.
미나미데라는 그 옆에 있었다.
절이 있었던 부지에 안도 다다오가 나무와 콘크리트를 사용해 지은 간결한 디자인의 건물이다.
건물 안에는 지추미술관에서 봤던 제임스 터렐의 작품이 있다. 빛 그 자체를 예술로 제시하는 작가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전시실 안으로는 15분에 한 번씩 들어가게 돼 있었다.
시간이 좀 남아서 바로 옆의 놀이터에서 놀았다.
아이는 땅을 고르는 무거운 롤러를 끌면서 재미있어 했다.
다시 미나미데라.
안내원의 설명에 따라 벽을 더듬어 가며 깜깜한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벤치 같은 곳에 앉으라고 해서 앉았는데 눈 앞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암흑이다.
곧 뭔가 나타나겠지 생각했는데 좀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거 좀 곤란한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옆에 있던 아이가 무섭다며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아이를 데리고 나가려는데 아내가 앞에 뭔가 하얀 직사각형 같은 게 보인다고 했다.
아이와 아내를 먼저 보내고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니 그 직사각형의 공간은 원래부터 있었고 희미한 자연광이 들어오고 있다고 했다.
내 시력은 10분이 넘도록 어둠 속 빛을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작품의 제목은 <Backside of the moon>. 달의 뒷면이 정말 이렇다면 쫌 오싹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나미데라를 나오니 아이는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다.
놀란 가슴은 좀 진정이 됐으려나.
미나미데라에서 마을을 가로질러 하이샤를 보러 갔다.
우리로 치면 구청격인 야쿠쇼바를 지나가는데 이 건물도 만만치 않다.
일본의 전통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푸른색 지붕을 이고, 옆과 뒷면에는 벽돌 건물 느낌이다.
하이샤(歯医者)는 이름 그대로 치과병원 겸 주거시설이었던 건물을 오오타케 신로(大竹伸朗)가 통째로 작품화한 것이다.
오오타케 신로의 작품은 베네세 하우스 옥외에도 몇 점 있고, 미야노우라의 대중목욕탕 <I ♥湯(아이러브유)>도 그의 작품이다.
그러고 보니 이것저것 잡동사니(?)를 끌어모은 것 같은 외관은 서로 닮았다.
그 다음은 이시바시.
메이지시대에 제염업으로 성공한 이시바시 고택을 재건한 것으로 나오시마의 역사나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정원에는 말 그대로 이시바시(돌다리) 하나가 놓여 있고, 실내 벽에 점점이 그려져 있는 수묵화 같은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고카이쇼는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질박한 건물이다.
옛날 바둑을 두던 장소였다고 한다.
입구를 사이에 두고 방 두 칸이 나란히 있다.
한쪽 방에는 대나무 막대가 놓여져 있고, 색색의 동백꽃이 흩뿌려져 있다.
다른 한쪽에도 대나무 막대가 놓여져 있는데 일반 나무를 깎아 대나무처럼 정교하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 앞 조그마한 정원에는 오색꽃을 피우는 동백꽃이 심어져 있었다.
이에 프로젝트는 혼무라의 마을에 녹아들어 있었다.
2-2.
점심을 먹고 혼무라 마을을 좀 더 둘러보기로 했다.
신년 연휴 직후의 평일이라 그런지 마을은 고즈넉했다.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거리를 둘러보는 관광객 몇몇이 눈에 띌 뿐이었다.
사실 <이에 프로젝트>도 인상적이었지만, <이에 프로젝트>를 찾으러 가는 길에, 그리고 이후에 마을 구석구석을 천천히 둘러보는 것도 즐거웠다.
혼무라는 교토나 나라처럼 수백년된 전통 가옥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도, 휘황찬란한 최신식 건물이 늘어서 있는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조그마한 섬의 평범한 마을.
수십 년 전에 지어진 목조 건물이 많았지만, 일본 어디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2층 가옥들도 많았다.
대도시가 주도하는 21세기식 속도전에는 따라오지 못하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 공간에 자신의 삶과 역사를 담아내면서, 자신들만의 마을 만들기를 하고 있었다.
길을 걷다 담장 너머로, 대문 너머로 얼핏 엿보게 되는 소박한 정원.
곳곳에 숨겨져 있는 아담한 가게들과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발견하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실로 윤곽을 그려놓은 작품도 있었고, 누군가 장난치듯 그려놓은 낙서도 있었다.
집 앞에 걸쳐 있는 노렌(のれん)도 마을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2001년 혼무라 노렌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혼마라지구의 가옥 14채의 처마 밑에 염색가 가노 요코(加納容子)가 제작한 노렌이 걸렸고, 이후 혼무라와 미야노우라 지구 약 50채의 집에 노렌이 걸리게 됐다고 한다.
고택에 걸린 야고효사츠(屋号表札)라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야고는 혼무라에 대대로 전해오는 일종의 별칭인데, 선조의 이름이나 출신지, 직업, 상호, 위치 등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혼무라에는 약 90채의 가옥에 스테인레스로 만든 야고효사츠가 걸려 있었다.
마찬가지로 스테인레스로 만들어 건물 모퉁이에 붙어 있는 자그마한 길 안내판도 재미있다.
혼무라에는 주민들의 일상 속에도 예술적 요소들이 스며들어 있었다.
2-3.
다시 '스나오군'을 타고 미야노우라 지구로 향했다.
대중목욕탕을 예술품으로, 아니 예술품을 대중목욕탕으로 변신시킨 <I ♥湯(아이러브유)를 직접 체험하기 위해서다.
오오타케 신로의 <아이러브유>는 보는 것만이 아닌 실제로 입욕가능한 미술시설로 2009년 7월 개관했다.
배의 일부와 나무, 지구본, 조각상, 타일 등을 조합해 놓은 외관뿐만 아니라, 목욕탕과 욕조의 타일, 화장실의 도기에 이르기까지 오오타케 신로의 기묘한 예술세계가 반영돼 있다고 한다.
남국의 섬에나 어울릿 듯한 특이한 외관을 빙 둘러보고 난 뒤 아내와 떨어져 아이와 함께 남탕에 들어갔다.
평일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욕탕으로 들어가자 신기한 세계가 펼쳐졌다.
하얀 타일이 깔려 있는 탕은 조명마저 형광등이어서 무척 밝고 낯설었다.
남탕과 여탕을 가르는 벽 위로는 거대한 코끼리 상이 지켜보듯 서 있었다.
정면 타일에는 바다 속을 그린 모자이크화가 있고, 단 하나뿐인 거대한 욕조 바닥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다.
수도꼭지 하나하나에도 콜라주 작업을 해놓았고, 화장실 변기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색색깔의 그림이 그려진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있던 일본인 2명이 나가고 아이와 둘만 남으니 즐거움은 두 배였다.
2-4.
숙소로 돌아오니 해가 지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서 다시 베네세 아트 사이트로 갔다.
전날 가보지 못한 선착장쪽으로 가봤다.
선착장 옆 절벽 가운데에 모니터가 있고, 반대쪽에는 타조알 같은 것이 놓여 있다. 뭘까.
바로 옆 해안가에는 폐선의 부품으로 만들었다는 오오타케 신로의 설치작품 2점이 세토내해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 사이로 지는 해를 배경으로 빛나고 있었다.
도로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지추미술관에서 봤던 월터 드 마리아의 작품이 놓여 있다.
역시 대형 구체. 이번에는 2개다.
바람이 잦아진 해안가를 거닐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뚫고 쏟아지는 햇빛이 장관을 이뤘다.
2-5.
이날 숙소는 트레일러.
파오보다는 훨씬 비좁았지만 역시 색다른 경험이었다.
간이 2층 침대가 있고, 소파 2개를 이어서 침대를 만들 수 있었다.
트레일러의 앞 창문을 통해 석양으로 물들고 있는 바닷가가 보였다.
처음에는 2층 침대에서 자겠다던 아이가, 소파를 이은 침대가 신기한지 그곳에서 자겠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비좁은 침대에서 가족 모두 자기로 했다.
아이를 가운데 두고 가족이 나란히 누웠다.
어제보다는 잔잔해진 파도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이불 속에 몸을 푹 묻고는 온기를 나눴다.
아이와 이런저런 장난질을 하다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3.
나오시마를 떠나는 날은 구름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이 맑았다.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서 숙소인 쓰쓰지소를 나왔다.
'스나오군'이 오기까지 모래사장을 걸어 다시 노랑 호박쪽으로 갔다.
언제봐도 유쾌한 이 호박을 마지막으로 사진에 담았다.
아이와 아내가 이 호박을 한입 가득 먹거나 손 안에 들고 있는 모습을 연출해 사진에 담았다.
이제는 너무나 친숙해진 '스나오군'을 탔다.
버스는 혼무라의 좁은 길을 지나간다.
미야노우라항으로 가는 언덕길.
몇 번이나 지나쳤던 하얀색 학교 건물이 차창 너머로 보인다. 코끼리 조각상이 정겹다.
미야노우라항에 도착해 우노항으로 가는 페리를 탔다.
뱃전에 나와 나오시마쪽을 바라봤다.
나오시마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빨강 호박이 우리를 말없이 배웅하고 있었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던 기분 좋은 이틀간이었다.
3-0.
나오시마.
지금은 '예술의 섬'으로까지 불리지만, 일본에 무수하게 존재하는 작은 섬 마을이다.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걸로 치면 이 섬보다 더 아름다운 섬이 수없이-우리나라에도- 많을 것이다.
이런 마을을 세계가 주목하는 마을로 탈바꿈시킨 데에는 자연과 예술의 공존을 꿈꾸는 베네세 아트 사이트 프로젝트가 있었다.
나오시마를 넘어 세토내해의 다른 섬에까지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베네세 그룹의 공을 부인할 수 없다.
자연에 순응하는 예술을 구현한 안도 다다오 등 예술가들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이곳에는 대대손손 마을을 가꾸고, 역사와 문화를 만들어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지금도 소박한 삶을 이어가면서 마을의 정갈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오시마는 '에코 아일랜드 플랜'을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예술은 마을 사람들의 일상 속에 녹아들어가 있었다.
어찌 보면 우리 가족이 즐거운 한때를 보낸 것도, 이곳에서 '손대지 마시오'라는 표시가 달린 미술관의 작품만을 본 게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오시마의 자연과 문화와 사람들 속에 어우러진 예술을 만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오시마의 예술 작품은 이곳 사람들의 삶과 문화, 그리고 자연과 함께 성장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의 섬' 나오시마가 세계를 향해 발신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여행 > 간사이 2011~2012'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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