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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왕마저 무시하는 일본 극우의 '성지' 야스쿠니

 일본 우익의 ‘성지’로 꼽히는 도쿄 야스쿠니(靖國)신사의 최고위직이 일왕을 비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천황제 군국주의 국가 부활을 위해선 일왕마저 비판하는 일본 우익들의 도착(倒錯)적 인식이 드러났다는 지적이 나온다.
 11일 일본 언론에 따르면 야스쿠니신사의 고호리 구니오(小堀邦夫·68) 구지(宮司)는 전날 신사 측에 퇴임할 뜻을 표했다. 구지는 신사의 제사를 맡은 최고위 신관이다. 신사 측은 “고호리 구지가 회의에서 극히 온당치 못한 단어를 사용한 녹음 내용이 (일부 주간지에) 유출됐다”고 밝혔다고 교도통신은 전했다. 
 앞서 주간지 <슈칸(週刊) 포스트>는 지난달 30일 발매된 10월12·19호에서 고호리가 지난 6월20일 열린 신사 회의에서 “폐하(일왕)가 열심히 위령(慰靈)의 여행을 하면 할수록 야스쿠니는 멀어져간다”, “확실히 말하면 지금 폐하는 야스쿠니를 부수려고 하고 있다” 등의 발언을 했다고 보도했다. 고호리는 “(지금 일왕이) 재임 중에 한 번도 (야스쿠니를) 참배하지 않았는데 지금 왕세자가 새 일왕에 취임하면 참배하겠나. 새 왕비가 될 그녀는 신사와 신도(神道)를 엄청 싫어한다”고도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고호리는 <슈칸 포스트>의 취재에 “아무 것도 모른다”고 했으나, 당시 발언 내용이 포함된 음성 녹음이 인터넷 상에 공개되면서 파문이 확산됐다. 고호리는 왕실 업무를 담당하는 궁내청을 방문해 사죄하고 퇴임 의향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월 취임한 고호리가 퇴임하면서 신사 최고위직이 반 년 만에 퇴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NHK는 전했다.
 야스쿠니신사의 최고위직이 일왕을 직접 비판한 것은 ‘불경(不敬)’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2차 세계대전 패전 직전까지 일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 신도(神道)의 중심이었다. 근대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천황(일왕)를 위해’ 목숨을 바친 신으로 모시며 일왕 숭배와 군국주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패전 후 연합군의 지시로 종교법인이 됐지만, 지금도 과거 제국주의 시절을 그리워하고 침략 전쟁을 부인하려는 우익 세력들의 성지 역할을 하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매년 패전일인 8월15일과 춘·추계 예대제 때 야스쿠니신사에 공물료를 납부해왔고, 국회의원들은 대거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해 왔다. 야스쿠니신사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A급 전범 14명이 합사돼있다.
 이런 야스쿠니신사의 최고위직이 일왕을 비판한 데는 현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야스쿠니신사, 나아가 우익 세력과 거리를 둬온 때문으로 풀이된다. 내년 4월말 퇴위하는 아키히토 일왕은 ‘국가의 상징’으로 일왕을 규정한 현행 헌법에 충실하면서 사이판과 오키나와 등 태평양전쟁 무대를 찾아 희생자를 위령해왔다. 즉위 이후 한 번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았다. 8월15일 “깊은 반성”을 말하는 등 극우 일변도인 아베 정권과 대비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반면 일본 우익들은 헌법을 고쳐 일왕을 ‘국가 원수’로 만들려는 등 과거 퇴행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결국 이번 사태는 ‘천황(일왕) 중심’을 외치면서도 자신들의 뜻에 맞지 않는 일왕은 내팽개칠 수 있다는 우익의 본질을 드러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한편 평소 일왕 관련 소식을 적극적으로 전해온 일본 보수·우익 언론들은 <슈칸 포스트> 보도 내용을 전혀 다루지 않다가 이날 고호리의 퇴임 소식만 짧게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