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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김진우의 도쿄 리포트

'레이와'의 일본 왕실

 지난 22일 나루히토(德仁) 일왕 즉위를 대내외에 선포한 ‘즉위례 정전의식’은 ‘레이와(令和·현 일왕 연호)’ 왕실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린 의식이었지만, 일본 왕실이 껴안은 문제를 새삼 부각시켰다. 이른바 ‘안정적인 왕위 계승’ 문제다.
 의식이 치러진 왕궁 내 풍경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일왕의 옥좌인 ‘다카미쿠라(高御座)’ 왼쪽에 동생 후미히토(文仁·53)를 비롯한 아키시노미야(秋篠宮) 일가 4명이, 오른쪽엔 휠체어를 탄 작은 아버지 마사히토(正仁·83) 등 히타치노미야(常陸宮), 미카사노미야(三笠宮), 다카마도노미야(高円宮) 일가 7명이 섰다. 1990년 아키히토(明仁) 일왕 때 남성 왕족 6명, 여성 왕족 7명이 좌우로 선 것과 대비된다. 의식에 참가할 수 있는 성인 남성 왕족이 2명밖에 없는 데 따른 궁여지책이다.  일본 왕실전범은 부계 혈통인 남성만 왕위 계승 자격을 인정한다. 현재 계승 자격자는 후미히토와 그 아들 히사히토(悠仁), 마사히토 등 3명뿐이다. 고령인 마사히토를 제외하면 현실적으로 2명밖에 없다.
 남성 왕족 부족은 일본 왕실 최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1965년 후미히토 이후 9명 연속으로 여성이 태어났다. 2006년 41년 만에 남성 왕족인 히사히토가 탄생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로 평가된다.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 純一郞) 정부는 여성여계(女性女系) 일왕을 인정하는 왕실전범 개정안을 제출할 방침이었지만 히사히토의 탄생으로 없었던 일이 됐다.
 현재 일본 왕실에서 30대 이하 왕족 7명은 히사히토를 빼면 전부 미혼 여성이다. 여성은 결혼하면 왕족 신분을 잃는다. 히사히토가 즉위할 쯤에 왕족이 없어질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히사히토가 즉위한 뒤도 문제다. ‘다음 왕위’는 히사히토의 부인이 남자아이를 낳아야 이어진다. 현재 13살인 히사히토에게 일본 왕실의 ‘존속’이 걸려 있는 셈이다.
 지난 8월 히사히토가 양친과 함께 처음 해외 방문을 했을 때도 이런 사정이 드러났다. 히사히토와 어머니 기코가 탄 비행기가 부탄 공항에 도착하고 20분 뒤 아버지 후미히토가 다른 비행기편으로 왔다. 비행기 사고로 1·2위 왕위 계승자가 동시에 사망하는 ‘최악의 경우’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데도 왕위의 안정적 계승을 위한 대책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 실정이다. 2017년 6월 국회는 “안정적인 왕위계승을 확보하기 위한 모든 과제, 여성 궁가 창설 등”을 신속하게 검토하도록 정부에 요구했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즉위 의식이 일단락되는 올 가을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가기로 했지만, 내년 봄으로 또 미룰 것이란 관측이 많다.
 논의의 공전(空轉) 배경에는 남계 남성에 의한 왕위 계승을 고집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를 비롯한 보수·우익 세력들이 있다. 최근 자민당 내 의원 모임이 2차 대전 패전 뒤 일반인이 된 ‘구 왕족’의 남성 일부를 왕족으로 복귀시키는 제언을 내놓은 데서도 이런 집착이 읽힌다. 이들은 “남계 왕위 계승을 126대 관철해온 것이 일본의 전통”이라며 “모계 천황(일왕)을 인정하면 이질적인 왕조, 천황답지 않은 천황을 낳게 된다”고 했다. 이런 주장에는 일왕이 초대 진무(神武) 이래 126대에 걸쳐 계보가 끊이지 않고 존재해왔다는 ‘만세일계(萬世一系) 신화’가 깔려 있다. 일왕이 ‘절대군주’였던 전전(戰前) 천황제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일본 우익들의 바람도 있다.
 유럽의 왕실에선 남녀평등 등의 영향으로 ‘장자 우선’ 제도가 확산되고 있다. 교도통신의 지난 26~27일 여론조사에서 일본 국민의 81.9%가 여성 일왕에 찬성했다. 일본 사회 최고의 ‘금기’로, 일본인에 내면화돼 있다는 ‘천황제’의 향방과 관련해 향후 왕위 계승 논의가 어떻게 전개될 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