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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한반도

조선학교 차별투쟁의 역사, 일본 양심을 흔들다

다큐영화 '아이들의 학교' 기대 이상 반향

 “이 세상에 차별당해야 할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지난 20일 밤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렌고(連合)회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조선학교 차별과 투쟁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학생들의 일상을 담은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아이들의 학교’가 도쿄에서 처음 상영된 자리였다. 
 하세가와 가즈오 ‘고교무상화에서 조선학교 배제에 반대하는 연락회’ 대표는 “20일은 (2013년) 아베 신조 정권이 고교무상화에서 조선학교를 배제할 것을 통지한 날”이라며 “도쿄, 오사카 등 5곳의 법정에서 싸우고 있지만 오사카 1심만 빼곤 패소했다”고 말했다. 이어 “법정에서 싸우기 위해선 여론을 바꿀 수밖에 없다”면서 “이 영화가 조선학교의 역사와 훌륭함을 일본 전체가 알게 하는 무기가 됐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아이들의 학교’는 기대를 넘는 반향을 얻고 있다. 지난 1월12일 오사카 제7예술극장에서 개봉되자 연일 만석을 기록해 오는 22일까지 연장 상영이 결정됐다. 전날 도쿄 상영회에서도 270석인 좌석이 다 차서 보조의자까지 들여왔다. 다음달 2일 교토를 비롯, 군마, 나고야, 히로시마 등에서 상영이 결정됐고, 자주상영회를 열고 싶다는 연락도 쇄도하고 있다.
 재일 2세 고찬유 감독(71)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자료와 증언, 아이들의 모습 등을 카메라에 담았다. 고 감독은 21일 전화 인터뷰에서 “조선학교의 현실과 역사, 실제 일어나고 있는 차별을 담았다”며 “조선학교에 한발도 들여놓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이들이 잘 잘라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영화는 오사카 코리아타운에 가까운 조선제4초급학교 입학식으로 시작해, 수업 및 부 활동, 운동회, 졸업식 등의 모습을 통해 아이들의 일상과 꿈을 포착했다. 운동회에서 조그마한 아이가 덩치 큰 엄마를 업고 달리는 장면 등에선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100년의 차별-그 투쟁의 기억’이라는 부제처럼 차별과 탄압으로 점철된 조선학교의 역사에 초점이 더 맞춰졌다. 1948년 연합군사령부(GHQ)와 일본 정부에 의해 조선학교 폐쇄명령이 내려지자 오사카와 고베에서 일어난 ‘4·24 한신교육투쟁’ 장면이 인상적이다. 당시 김태일 소년(16)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경찰관 3명이 권총을 조준하고 있는 영상이나 ‘치안을 위해서 쏘라’는 GHQ  문서 내용, 당시 반대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의 증언이 생생하다.
 영화를 제작한 것은 “90년대까지 조금씩 진척을 보이던 조선학교 차별 문제가 2010년대 고교무상화 문제가 불거진 이후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는 2010년 고교 무상화 조치를 시작했지만 조선학교는 북한 문제를 이유로 적용 대상에서 보류했고, 아베 정권은 2013년 조선학교를 대상에서 아예 제외했다. 지자체의 보조금 폐지도 잇따르고 있다. 이에 대해 조선학교 졸업생들이 차별적 조처라며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여러 법원에 제기했으나 1심 또는 2심에서 모두 패소했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와 아동권리위원회는 이미 수 차례 일본 정부에 조선학교 고교무상화 배제 정책 시정을 권고했다.
 영화에선 고교 무상화 제도 설계에 관여한 마에카와 기헤이 전 문부과학성 사무차관이 나온다. 그는 “관제 헤이트(정부가 주도하는 혐오·차별)”라고 잘라말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에 대한 영화 ‘귀향’의 주연배우 강하나(당시 오사카 조선고급학교)는 오사카에서 처음 승소했을 때 “살 가치를 인정받은 것 같다”고 눈물을 글썽인다. 하지만 이후 2심 재판에선 조선학교 측이 패소한다. 조선학교 학부모들은 “아이들에겐 인권이 없나”, “일본은 법치국가가 아니다”라고 절규한다. 객석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 감독은 현재 한국어판과 영어판을 준비하고 있다. 미국과 프랑스 , 독일 등지에서 상영하고 싶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어 국제적인 운동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일본 정부의 차별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사법까지 이를 인정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투쟁에도 좀체 해결되지 않는다”면서 “고생스럽게 노력하는 조선학교 관계자, 학부모,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화기 너머 그는 울먹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