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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슈이치, <언어와 탱크를 응시하며>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 가토 슈이치(加藤周一, 1919~2008년)의 책. '언어와 탱크를 응시하며'라는 제목은 1968년 소련군의 체코 프라하 침공을 목격하고 쓴 글에서 따왔다.

 "언어는 아무리 날카로워도, 또한 아무리 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도 한 대의 탱크조차 파괴하지 못한다. 탱크는 모든 목소리를 침묵하게 만들 수 있고 프라하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 1968년 여름, 보슬비에 젖은 프라하 거리에서 마주 서 있던 것은 압도적이지만 무력한 탱크와 무력하지만 압도적인 언어였다. 그 자리에서 승패가 정해질 리 없었다."

다음은 서경식 교수의 해설을 포함한 본문 발췌. 

-가토 슈이치는 이 ‘이설’의 요점을 이렇게 해설한다. 첫째, ‘이설’은 15년 전쟁(아시아태평양전쟁)은 “아시아 나라들의 독립을 촉진하는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해방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전시 ‘대동아공영권’의 다테마에와 같다. 하지만 정말로 식민지 지배로부터 아시아 나라들을 해방하는 것이 일본 정책의 목적이었다고 한다면, 싱가포르나 인도네시아에서가 아니라 우선 한반도라든가 ‘만주국’을 해방했을 것이다.”
 둘째로 ‘이설’은 “분명 일본군은 나쁜 짓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유별나게 나쁜 것도 아니었다”, “전시라면 언제 어디서든 있는 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100명 목 베기 경쟁’, ‘난징학살’, ‘731 부대의 생체실험’, ‘강제 노동’과 ‘하나오카 사건’, ‘바탄 행진’, ‘종군위안부’ 등이 있었다. “전시라면 어디서나 있는 일이라고 치워 버릴 수는 없다.”
 셋째로 ‘이설’은 “침략과 식민지화는 일본만 했던 것이 아니라고도 한다. 그런 주장에 나(가토)는 찬성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본만 사과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타자의 잘못이 우리 자신의 잘못을 면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넷째, ‘이설’은 “제2차 세계대전의 ‘민주주의 대 반민주주의’라는 체제 경쟁을 말하지 않는다. 1945년이 일본에게 패배를 의미했을 뿐만 아니라, 광신적 군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고 하는 사실을 잊기에 50년은 너무 짧다.”

-‘전후 50년 결의’ 시기를 경계로 현재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우경화·반동화가 시작되었다. 이때 우파의 젊은 의원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아베 신조는 현재 총리 대신의 자리에 있다.

-일본 사회의 중심이 천황이 아니라 인민이 되지 않으면 일본의 호전적 성격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황제야말로 메이지 정부의 반동적 성격과 일본 자본주의의 호전적 특징을 요약하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독일어에서는 ‘청산’을 아프레히눙(Abrechnung)이라고 한다. 독일어에서 늘 쓰이는 말은 ‘과거 청산’이 아니라 ‘과거 극복’(이라고 지금부터 번역할 Vergangenheitsbewaltigung)이다. 그 뜻은 전쟁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하고 보상하며(대 국가·개인 피해자), 장래를 향해 길을 걷고자 한다는 것이다. 과거는 청산할 수 없지만, 극복하는 건 가능하다. 혹은 적어도 극복하고자 노력할 수 있다.

-(전후 50년 결의) 그러나 국회는 ‘침략전쟁’을 명언하지 않고, 사죄하지 않았으며, ‘불전’을 말하지 않고 모호한 ‘반성’을 결의함에 있어서조차 오랜 시간을 줄다리기하고, 게다가 만장일치를 실현할 수도 없음을 만천하에 폭로하고 만 것이다. 이로써 아시아의 불신감은 강화되었으면 강화되었지 약해지진 않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한 재일한국인이 “이로써 일본은 최후의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말한 그대로다. (중략) 과거를 속여가면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없는 법이다.

-전후 일본과 독일을 대비해가면서 “과거를 확실히 과거로서 검토하지 않고 그대로 현재에 연결하고 전쟁 책임에는 둘러대기를 되풀이해온 것은 전후 일본의 최대 실패였다”고 보아 그것을 ‘윤리적 실패’와 ‘정치적 실패’라는 두 가지 면에서 검토한 것이 [‘과거 극복’의 각서](1995), “국민(의 대다수)도 권력도 가해자로서의 일본의 과거를 물에 흘려보낸” 것에 대해 “흘러가지 않은 것은 피해자, 주로 아시아의 여러 나라 국민들뿐”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한 후에 가토는 ‘지식인’의 태도를 언급한다. “소수 광신적 초국가주의자”, “극소수 반전주의자”를 제외한 대다수 지식인이 권력 내부로 포섭되거나, 전쟁에 협력하거나, 대세순응주의였다고 가토는 비판한다. 그래서 2000년대의 가토 슈이치는 헌법 9조를 둘러싼 실천적 활동과 비평을 통일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