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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김진우의 도쿄 리포트

"칼빈슨은 어디 있어?"

지난 주말 가나가와(神奈川)현 요코하마(橫浜)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바다를 따라 조성된 야마시타(山下) 공원을 걷다보니 히카와마루(氷川丸)가 보였다. 1930년 건조돼 1960년까지 시애틀 항로를 오간 12000톤급 호화 화물여객선이다. 

나들이객들이 히카와마루를 배경으로 즐겁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10살 남짓한 일본 남자아이가 아빠에게 묻는다. “칼빈슨은 어디 있어?” 

‘골든위크(황금연휴)’ 막바지에 아이의 입에서 미국의 핵추진 항공모함 칼빈슨호 얘기가 나올 줄은 예상 못했다. 하긴 지난 한 달여간 일본 정치권과 보수 언론들이 야단법석을 떤 걸 감안하면 놀랄 일도 아니다. 아이의 뇌리에 ‘칼빈슨’이라는 이름을 새겨넣었을 정도로 칼빈슨호의 동향을 시시각각 전했으니 말이다. 

한반도 위기론을 둘러싼 일본 측의 야단법석은 칼빈슨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외무성은 해외여행 관련 홈페이지에 한국을 방문하는 자국민들에게 한반도 정세에 주의하라는 경고문을 올렸다.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는 북한이 사린 가스를 미사일에 장착할 수 있다고 대놓고 얘기했다. 언론에선 미국의 대북 군사행동시 일본의 사전협의 요청, 한반도 유사시 일본 국민과 납치 피해자 구출 방안 마련 등의 내용이 일본 정부 고위관계자발로 보도됐다. 급기야 북한의 미사일 발사 뉴스에 도쿄 지하철과 일부 신칸센의 운행이 잠시 중단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칼빈슨호의 한반도 해역 전개로 한반도에 전운(戰雲)이 급격히 감돌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반응을 아예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일본 정치권과 보수 언론들이 합작해 한반도 위기론을 부추기고, 일본 국민들의 불안감을 키우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 정부는 지난 1일 해상 자위대에 미군 군함을 보호하는 ‘무기 등 방호’ 임무를 처음 부여했다. 이에 따라 항공모함급 호위함인 ‘이즈모’가 미 보급함을 이틀 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일본 정부는 또 미국산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도입을 위한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적 기지 공격 능력’을 보유하겠다는 것이다.아베 총리는 헌법 시행 70주년을 맞은 지난 3일 2020년 개정 헌법 실시, 자위대 헌법 명시 등의 구상을 밝혔다. 하지만 이는 ‘화룡점정’일 뿐 일본은 이미 ‘전쟁 가능한 국가’를 향해 착착 나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위협론은 ‘전쟁 가능한 국가’를 향한 아베 정권의 행보에 좋은 구실인 셈이다. 이솝 우화 ‘늑대와 양치기’에 비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물 들어온 김에 노 젓겠다’는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실패로 끝난 북한 미사일 발사 뉴스에 다중이용시설인 지하철의 운행을 멈추면서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는 원자력발전소는 왜 멈추지 않았나. 게다가 미 보급함 방호 임무는 북한의 위협이 없는 태평양 쪽에서 이뤄졌다. 소형 호위함을 투입해도 될 일이다.

‘칼빈슨’을 입에 올리는 아이를 보고 호들갑을 떤다고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권이 부채질하고 조성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는 국민들의 생각에까지 널리 영향을 미친다. 2차 세계대전 직전의 독일 나치나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부채질하고, 국민들의 감정을 지배하면서 전화(戰火)를 향해 내달렸다. 

‘한반도 4월 위기설’은 다행히 ‘설’로 끝났다. 하지만 한반도의 긴장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한반도 위기설’의 한 켠에는 주요 우방국인 일본이 있다. 그 일본은 지금 평화국가에서 전쟁국가로의 전환을 통해 ‘전전(戰前) 복귀’라는 위험한 선택을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군사적 대응만 강조하고, 주변국과의 긴장을 높이는 일본의 선택지에 ‘한반도 평화’가 설 자리가 과연 얼마나 남아있을까.

‘악몽’은 아주 작은 불씨를 통해 현실로 나타난다. 그것이 역사가 가르쳐주는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