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17
윤병세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2015년 12월28일 서울 세종로 외교부 청사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공동기자회견을 마친 뒤 악수하고 있다. 서성일기자
2015년 12월28일 한국과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합의했다.
한국 정부 외교수장의 입에서 “이(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윤병세 외교부 장관)는 말이 나온, 향후 논란을 예고했던 합의였다.
그로부터 1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한·일 위안부 합의를 둘러싼 논란과 갈등은 ‘현재 진행형’이다. 특히 신년 벽두부터 부산 ‘소녀상’ 문제로 한일 양국 간 냉전이 연출되고 있다.
앞서 지난 6일 일본은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 소녀상 설치 문제로 주한 일본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하고, 한·일통화스와프 협상을 중단하는 등 한국 정부를 압박했다. 아베 총리는 지난 8일 “일본 정부는 합의에 따라 10억엔의 돈을 냈으니 한국 측이 제대로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했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 책임을 ‘10억엔’으로 해결했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위안부 합의 무효화를 요구하는 국내 여론은 계속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정국과 맞물려 이 같은 여론은 더욱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피해 당사자와 국민 반대를 무릅쓰고 합의를 강행한 한국 정부가 ‘제 발에 도끼를 찍은’ 후과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일방·졸속 합의 논란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무상이 2015년 12월28일 서울 세종로 외교부청사에서 발표한 한일 위안부 합의는 당시부터 논란이 불거졌다.
▶관련기사 : 한일 정부 '위안부 문제' 합의
일본의 법적 책임 문제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인한 위안부 문제의 해결 여부 등 핵심 쟁점을 피해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함으로써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역사적 입증과 평가의 길을 원천 차단해버렸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게다가 그동안 ‘피해자와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해결책’을 만들겠다고 강조해왔던 정부는 정작 피해자 단체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는 이번 합의에 대해 사전 협의를 하지 않았다.
▶관련기사 : [기자메모]일본이 잃은 건 10억엔뿐
소녀상 이전 문제도 논란의 불씨를 남겼다. 합의문에는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고 있는 점을 인지하고, 한국 정부로서도 가능한 대응방향에 대해 관련 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일본 측은 이 같은 내용을 ‘제 논에 물대기’ 식으로 끌어다 소녀상 이전을 기정사실로 만들려고 했다. “소녀상 이전이 10억엔 지출의 전제조건”이라는 얘기도 잇따랐다. 기시다 외무상은 회담을 마친 뒤 일본 기자들과의 비공개 간담회에서 “잃은 것은 10억엔뿐”이라고 말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한국 정부가 소녀상 이전이 10억엔 지출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고 밝히면서 ‘전제 조건’ 논란은 잠잠해졌다. 하지만 10억엔 지출을 통해 소녀상의 철거·이전을 비롯한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해결이 이뤄졌다는 일본 측의 의도는 결국 지난 8일 아베 총리 발언에서 드러났다.
▶관련기사 : 아베 “10억엔 냈으니, 한국 정권 바뀌어도 위안부 합의 지켜야”
2016년 1월9일 경향신문 [김용민의 그림마당]
한국 정부는 한일 위안부 합의가 ‘현실적인 최선의 합의’라는 점을 강조하느라 바빴다.
합의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시간적 시급성과 현실적 여건 하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이루어 낸 결과”라면서 “한·일관계 개선과 대승적 견지에서 이번 합의에 대해 피해자 분들과 국민 여러분들께서도 이해를 해 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외교라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준규 주일 대사는 지난해 8월30일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일 정부의 합의를 많은 피해자가 지지하고 있다”며 양국이 착실하게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29일 기자간담회에서 위안부 합의 비판여론에 대해 “위안부 피해자 중에는 고마워하는 분이 더 많이 계시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도 가세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12일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며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이준헌기자
그는 2016년 1월1일 박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박 대통령께서 비전을 갖고 올바른 용단을 내린 데 대해 역사가 높게 평가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졸속 합의에 대한 비판여론이 커지는 상황에서 박 대통령 편을 든 것이다. 유엔이 ‘반 인륜적 범죄’라 못박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유엔 사무총장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하지만 반 전 총장은 지난 12일 귀국, 본격적인 대선 행보를 시작하면서 “위안부 할머니의 한을 풀어줘야 완벽한 합의”라고 해 ‘말 바꾸기’ 논란에 휩싸였다.
▶관련기사 : 반기문 "위안부 할머니 한 풀어줘야 완벽한 합의"..."역사가 높게 평가할 것"이라더니...
하지만 한일 위안부 합의 무효화를 요구하는 여론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피해 할머니들과 시민단체는 물론, 종교계와 대학가 등에서도 합의 폐기를 요구하는 시국선언이 이어졌다. 대학생들은 이번 합의를 ‘2차 굴욕 한일협정’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특히 지난해 3·1절은 위안부 문제가 주제였다. 전국 곳곳에서는 한·일 위안부 합의를 무효화하고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촉구하는 행사들이 열렸다
▶관련기사 : 전국서 “위안부 합의 무효…역사 바로잡자”
위안부 합의와 맞물려 소녀상 철거 논란도 시민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다. 젊은이들은 소녀상을 지키기 위해 밤을 세웠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정기 수요시위에는 초등학생까지 참석해 피해 할머니들과 뜻을 함께 했다. 특히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위안부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사업과 위안부 백서 발간 작업 등 정부가 추진해온 위안부 피해 알리기 사업이 대부분 중단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비판은 더욱 거세졌다.
논란의 와중에도 소녀상은 국내를 넘어 국외로까지 퍼져나갔다. 지난해 10월 시민의 성금으로 만들어진 ‘한·중 평화의 소녀상’이 중국 상하이사범대학에 건립됐다.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와 미시간주에 이어 워싱턴에서도 소녀상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캐나다, 호주에도 소녀상이 세워졌다.
지난해 10월 22일 중국 상하이사범대학에서 열린 한·중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서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가 소녀상의 얼굴을 닦아주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하야를 촉구하는 촛불집회에서도 위안부 합의 무효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도 일방적이고 졸속으로 이뤄진 한일 위안부 합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관련기사 : "한·일 정부의 일방적인 합의 선언으로 위안부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니다"...일본 역사학자들, 성명
국내외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지난 7월 ‘화해·치유재단’이 출범,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일본 정부도 합의에 따라 지난 9월 10억엔을 출연했다. 이에 맞서 정대협 주축으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정의기억재단)이 출범했다. 위안부 피해자 11명과 이미 사망한 6명의 유족들은 일본을 상대로 직접 법적 책임을 묻는 소송도 제기할 계획이다.
■제 발등 찍은 정부의 위안부 합의
한일 위안부 합의를 둘러싼 논란은 합의 1년째가 되는 날 또다시 불거졌다. 시민단체가 지난 12월28일 부산 일본영사관 앞에 ‘평화의 소녀상’을 기습 설치한 것이다. 이후 해당 구청의 철거와 압수, 시민들의 반발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소녀상은 일본 영사관 앞에 놓이게 됐다.
그러자 일본은 이에 항의해 지난 6일 주한 일본대사·부산총영사 일시 귀국, 한·일 통화스와프 협상 중단 등 잇따른 강경 조치를 취했다. 한국이 위안부 합의를 지키지 않았다는 게 일본의 명분이지만,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당사자가 되레 피해자를 비난하는 전도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상황은 결국 1년여 전 굴욕적이고 일방적으로 이뤄진 위안부 합의가 근본적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도 해내지 못했던 최선의 결과’라고 위안부 합의를 치켜세웠지만, 이번 합의로 피해자인 한국이 오히려 가해자인 일본에 공격을 당하는 빌미가 제공됐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결국 정부가 연내 협상 타결에 연연해 국내 여론을 설득하지 못한 채 졸속 합의를 하고, 일본에도 약점을 잡혀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관련기사 : [사설]누가 역사의 가해자 아베가 큰소리 치게 만들었나
분명한 것은 한일 위안부 합의로 피해자들과 시민사회가 줄곧 주장했던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 및 사죄 요구가 가로막힐 상황에 직면했다는 점이다. 합의 이후 1년이 지났지만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겐 화해도, 치유도 너무나 먼 얘기에 불과했다.
‘평화의 소녀상’ 설치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 갈등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 9일 전국의 소녀상이 따뜻한 외투나 목도리를 두르고 있다. 왼쪽은 최근 부산 일본영사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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