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수도 베를린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이 철거 위기를 넘겼다. 철거를 요구했던 베를린 미테구청이 지난 13일(현지시간) 소녀상을 당분간 그대로 둔 채 합의점을 찾겠다고 밝히면서다.
앞서 미테구는 지난달 말 제막식 이후 일본 측이 반발하자 소녀상 설치를 주관한 시민단체에 소녀상을 철거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지난 7일 보냈다. 이에 각계 반발이 확산되자 물러선 것이다.
일련의 진행 과정이 낯설지 않다. 일본 정부와 우익 세력이 전 세계로 퍼지고 있는 소녀상의 존재를 기를 쓰고 지우려 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1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에 해외에서 처음으로 소녀상이 세워지자 일본 극우단체는 이듬해 LA 연방지법에 철거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당시 글렌데일 시장은 LA 주재 일본 총영사로부터 소녀상을 철거하라는 압박을 받았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지난해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에서 열린 국제예술제 ‘아이치 트리엔날레’에선 소녀상이 출품된 <표현의 부자유전·그 후> 전시가 사흘 만에 중단됐다. 우익들의 항의·협박 전화와 보조금 교부를 문제 삼은 일본 정부의 압박 등이 배경에 있었다. 전시는 폐막 일주일을 앞두고 ‘조건부’ 재개됐다.
독일에서도 선례가 있다. 2017년 남부 비젠트에 유럽 최초로 소녀상이 세워졌는데, 일본 측 압박으로 비문이 철거됐지만 소녀상은 지켜졌다.
소녀상으로 상징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주전장(主戰場)’이 일본·미국은 물론, 유럽으로까지 확대되는 모습이다. 공통점은 일본 측의 집요한 철거·중지 압력이 있었고, 이에 맞서는 시민사회의 분투가 있었다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주전장>의 미키 데자키 감독은 지난해 4월 인터뷰에서 일본 측이 왜 위안부 문제를 ‘침묵’시키려고 하는지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위안부 문제는 전쟁피해 여성 인권의 문제다. 보편적 인권 문제라는 점에선 한국, 동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의 문제다. 위안부 문제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용기 있는 증언과 국내외 시민단체·전문가들의 노력으로 유엔 인권조사관 보고서로 채택됐고 국제사회에서 전쟁범죄로 규정됐다. 이 문제만큼은 일본이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국제적 인식이 자리잡았다. 일본 측이 위안부 문제 공론화를 그토록 꺼리는 이유다.
이런 사정이 이번 베를린 소녀상 철거 논란에서도 드러났다. 일본은 ‘반일 민족주의’ 프레임으로 몰아가면서 철거를 압박했다. 하지만 베를린 시민사회는 전쟁시 여성 성폭력이라는 인권 문제를 내세웠다.
이는 위안부와 소녀상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과 대응에도 시사점을 준다. 미키 데자키 감독도, 베를린 시민단체 측도 위안부는 ‘보편적 인권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되레 한국 사회에서 ‘반일’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건 아닌지 되짚어봐야 한다. 국제적 연대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국내용 캠페인’을 우선하는 건 아닌지 말이다. 그것이 위안부 운동을 복수심에 불타는 한국인들의 반일운동으로 몰아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역사와 여성 인권 문제를 부인하려는 일본의 ‘덫’에 빠지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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